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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로 Mar 15. 2021

개+새끼

우리 똥강아지와 우리 아이

개새끼라는 욕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새끼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강형욱이라는 한국의 한 철학자에 의해 계몽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에 관한 한 개를 문제로 놓고 볼 수만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의 인식에 있어서 이 철학자의 영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더불어 우리는 이 철학자와 함께 또 다른 한 위대한 한국의 철학자인 오은영 박사의 가르침을 따라가 봄으로써 욕으로서 새끼가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온갖 변주가 가능한 -새끼는, 새끼 앞에 놓일 수많은 범주들이 오직 새끼에 의해 매개되어 욕이 된다는 것 외에도 욕+새끼의 용례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놈의 새끼, 씹+새끼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이러한 새끼 앞에 놓인, 다른 어떤 욕으로서, 새끼 이외의 것이 새끼와 갖는 관계마저도 새끼의 '새끼-됨(임being)'이라는 용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다양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인간에 대해, 오직 인간에 대해, 이 욕이 갖는 높은 비중을 생각해 보았을 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자식-새끼라는 의미의 새끼가 다른 범주와 달리 내-새끼라는 용례에서만 단 하나의 예외적 범주로 되는 상황이 그 ‘내(나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게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결국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새끼는 욕이 된다. 이 같은 사실을 오늘날의 지상명제인 이윤추구의 극대화라는 도덕률에 비추어 봤을 때, 자식이 의미하는 바를 가늠하게 해 준다. 자식은 곧 사업으로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개인-사업가가 감당할 수 없는 사업인 동시에 오늘날의 도덕에도 위배되는 비도덕적 사업으로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한 사람의 면전에 대고 던져진 욕은 그 사람의 행실에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내-새끼로 두고 있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내+새끼 사이의 파열을 예고하는 파멸의 예언으로서 행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끼를 내+새끼로 두고 있는 사람에게 -새끼가 결코 너의 새끼가 될 수 없음이 여기에서 오롯이 증명되고 있는 바, 그 사람은 그렇게 나의 새끼를 잃음으로써 지금 여기의 그 새끼는 아무 새끼의 새끼로도 되지 못 한다는 예언이다. 그가 곧 무연자고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에 대해 위의 철학자는 '우리 아이'라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그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기본적으로 자식-사업은 한 인간이 감당해 낼 수 없는 병리적 현상으로 되었다. 이 원인에는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에 대해 새끼라 결정짓는,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그 스스로 예언자가 되어 버리는 사건의 연속에서 남발되는 예언의 중첩에 의해 사회가 미리 결정되어버리는 것에 있다. 이렇게 결정된 사회, 곧 나의 새끼를 언제고 잃으면서도 스스로 아무 새끼의 새끼도 되지 못하는 새끼들의 사회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아이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은 내 새끼가 달리 내 새끼이겠느냐 하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새끼가 아이가 되는 사회에서 나의 새끼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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