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간 영웅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1월에 눈이 펑펑 내려 쌓인 날, 친구들과 옛 추억을 소환했다. 우리 강원도 첩첩산중 방태산휴양림에 놀러갔을 때, 눈이 무릎까지 쌓였었잖아. 막 필카로 코닥 필름 서너통씩 찍어댔지. 눈밭 위에 드러눕고. 그게 대체 십 몇 년 전이니.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만약에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 타이밍 맞춰 주식과 비트코인과 아파트를 사고 싶구나. 야. 아니 저기요. 이거 보세요!
나는 친구의 발언에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친구의 잘못이 아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변화가 필요하다. 나는 잠시간 영웅이 되기로 한다.
일상의 고단함이 정지된 시간 / Super Hero / 내 어린 날의 새벽을 살며시 깨워내 / 지구를 구해내는 영웅도 되고 / Super Hero / 달나라에도 가겠지 / 날 당할 자 그 누구던가 / I'm a Super Hero
영웅에겐 적당한 허세가 필요하다. 이거 봐라, 딱 나를 위한 조건일세. 나는 난세의 영웅이자 허세의 영웅으로,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를 신처럼 받들며 내 분별능력을 어디에 쓸지 고심하는 21세기형 히어로이다. 세상의 부조리는 모두 PC함의 부재에서 오는 것임을 모두 알아두어라.
히어로가 된 나는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기 보다는 빅픽쳐를 그린다. 세상을 떠난 철학가들의 여전히 유효한 말들을 수집한다. 혁명가들의 초심을긁어모은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하던 종교인들의 발에 묻은 흙을 모은다. 남의 자식 입에 모자란 밥을 떠넣어주고, 담요 한 겹을 더 덮어주던 전쟁통 난민의 모성애 아님. 부성애 아님. 인류애를 모은다.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때문에 바쁜 길에 발이 묶여도 불평하지 않고 그들을 응원하던 소시민의 위대한 마음을 모은다. 동생처럼 키운 닭을 먹을 수 없어 눈물흘리던 아이의 마음을 모은다. 초록 새싹이 소중해 쓰다듬어주는 아가의 조심스러운 사랑을 모은다.
캬. 이런 걸 모으러 다니는 내가 멋져서가슴이 웅장해진다. BGM을 갈아치워야겠다. 이승환은 어쩐지 야개. 좀 더 웅장하게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으로 체인지. 모을 것을 다 모은 나는 슈퍼히어로이므로 1악장만 몇 번 돌려듣기도 전에 이 귀한 것들을 토대로 희대의 집필을 마치려다가 너무 요즘 트렌드와 어긋나는 거 같아서 고뇌를 좀 하기로 한다. 이승환을 베토벤으로 바꾼 것은 과연 pc한 일인가? 제3세계 음악 중에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은 얼마든지 있잖아? 허허, 그런데 아는 노래가 없네, 이거 참 순도 100의 피씨함을 위해서는아직멀었구먼.
눈살이 찌푸려질만큼 허세스럽게 집필을 완성한 슈퍼히어로는 망또를 두르고 지구의 공전 속도보다 빠르게 이동하며 전 세계 정치인들을 비롯, 지도자라고 불리는 이들, 기득권자들에게 ( )을 남김없이 배포한다. 그들은 히어로의 저작물 ( )에 빠짐없이 감화되고, 지구는 위기를 차차 벗어난다.
욕망과 이기심이 사라진 자리에 더는 탄소가 심각하게 배출되지 않았다. 중산층의 사람들은 예전보다 덜 사고 덜 먹고 덜 버렸다. 공장식 사육장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성적지향과 종교, 장애 등을 이유로 죄없는 소수자들을 향해 삿대질하던 손가락은 모두 겸허하게 오그라들었다. 무기회사는 그동안의 무대포를 통렬히 반성했다. 난민은 더 이상 터전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약자에게 가해지던 폭력은 사라졌다. 지구는 살만해졌다. 얼마전 화성에 도착한 퍼시비어런스 호의 탐사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굳이 인류의 미래를 점쳐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흡족한 나, 슈퍼히어로는 위의 ( )에 들어갈 집필서의 제목을 고민해본다. pc지침서? 야개. pc경전? 하.. 카피라이팅이 영 안되네. 이래서 빈 구멍 매우라고 어벤져스같은 거 결성하고 그러는구나… 제목 따위 다 좋아. 스토리가 순조롭게 엔딩까지 흘러왔...는데 이제와서 빌런이 등장한다.
“엄마, 나 책 다 읽었어. 이번 호 토론 주제는 영웅이야.”
“그래? 영웅 뭐?”
“영웅이 꼭 필요한걸까?에 대한 내용이야.”
영웅이 필요하냐니. 네 눈 앞에 지구를 구하고 돌아온 영웅을 두고 도전장을 내미는거냐? 훗. 열두살 빌런 쯤이야 쉽게 물리쳐주겠다.
아이야. 박완서 선생님은 1989년에 신문에 이런 칼럼을 쓰셨어. 사는 곳을 말해야 할 때 소심해진다고. 일 년 새 두 배로 값이 뛴 아파트에 사는 것이 부끄러워서. 가만히 앉아서 불로소득을 얻는 것이 부끄럽다고. 엄마는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 영웅이라고 생각해. 며칠 전에 돌아가신 백기완 선생님은 어머님이 “이웃들이 다 어렵게 사는데 네 배지(배)만 부르고 네 등만 따시고자 하면 너 인마, 키가 안 커!”라고 하신 말씀을 평생 기억하고 살았대. 예수님도 부처님도 다 그런 분들이야. 자신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영웅이지. 그런 영웅은 필요하다고 봐. 너도 늘 약자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렴.
“내가 약자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자가 되면?”
“......”
“우리집 집값은 몇 배 올랐어? 엄마는 우리집값 오르면 부끄러워?”
“......”
아니 좋아. 집값 오르면 완전 좋아. pc고 뭐고 네가 약자 말고 영향력 뿜뿜한 착한 강자가 되면 좋겠어. 나도 십몇년 전으로 돌아가면 비트코인 살거야. 와, 이게 뭐야? 빌런은 내 안에 있었네. 분하다. 다시 돌아오겠다. 쭈그리가 된 허세의 영웅.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Super H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