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유 May 25. 2022

부록 - 우울감에 휩싸일 때 꺼내보는 지침서

암흑 속을 걷고 있는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친구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흘렀고,

지하철을 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거의 오열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더운 여름 날씨가 너무 불쾌해서 비싸게 산 블루투스 이어폰을 바닥에 던져 산산조각 냈다.

살면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우울증이었는지 뭐였는지는 병원에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신기했던 것은, 물론 그렇게 힘들만한 이유가 있었고 어려운 고민이 있었겠지만 우울감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객관적인 상황 판단이 전혀 안된다는 것이었다.

우울의 시간과 깊이는 사안의 중요성에 비례하지 않는다. 한번 우울감에 휩싸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가속력이 붙고 나도 모르는 사이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삼켜진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정말 싫어한다. 우울증이나 우울감을 "극복"하는 것이 목적인 책을 보면 마치 나는 비정상이고 책을 쓴 사람은 정상인 것처럼 보여서 치욕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나는 그저 나와 비슷한 시간을 지나온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그 시간 속의 내 곁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 누군가 혼자 암흑 속을 걷고 있다면 그때의 내가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을 전해주고 싶다.


당신을 더 힘들게 하는 말은 무시해라

이미 해질 대로 해진 마음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뭐가 그렇게 힘드냐는 둥, 마음 약한 소리 하지 말라는 둥... 가족, 친구, 주변인 중 누군가가 당신을 더 힘들게 하는 말을 한다면 최대한 회피하고 무시해라.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자. 그들은 틀렸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조건 옳다.


조용한 카페에 앉아 소설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핸드폰을 보거나 넷플리스를 정주행 하는 것은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 나도 다 해봤지만 특히 영상을 보면서 느끼는 쾌락은 잠깐이며 건강에도 좋지 않고 끝에는 허무함이 밀려온다.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다 보면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그 대신, 일단 밖에 나가서 조용한 카페에 앉아 있는 걸 추천한다. 좋아하는 음료를 시켜놓고 팟캐스트나 노래를 들으면서 멍 때리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 시간이 생각보다 금방 간다. 책은 현실과 닿아 있는 논픽션, 에세이보다는 허구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소설을 추천한다. 소설 속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지금 내 감정들이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기 시작한다. 혹시 당신이 나 같은 극단적 INFP라면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를 강력 추천한다.


외부 자극이 적은 곳으로 피신해도 괜찮다

마음이 힘들 때  예민해지는 건 당연하다. 사소한 일에 쉽게 짜증이 나는 건 물론이고 괜찮은 척 즐거운 척 가면을 쓰고 감정을 감추는 일은 더더욱 힘들다. 사회성이 요구되는 행사나 모임에 초대받는다면 거절해도 괜찮다.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다. 지나고 보니 남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다가 허비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일 때 중요한 결정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친구와 얘기를 하던 중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일 때 중요한 결정은 하지 마라"는 말을 들었고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우울하고 한없이 가라앉을 때 오히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차 홀로 분주하다. 나도 기억한다. 어떻게든 내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고, 아니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관심도 없는 일자리를 찾아 정신없이 지원했다. 또, 이것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 그동안 어렵게 세워 온 나만의 기준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새로운 직업, 새로운 목적지를 찾았다. 정답이 없는 문제의 정답을 찾으려고 포털사이트의 익명의 누군가의 "고견"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그때 내린 결정을 나는 지금도 가끔 후회한다.


돈 아끼지 말고 조금이라도 기분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자

우울한 시기를 보낼 때의 나는 수입이 없었고 사는 곳과 하는 일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가난했던 건 아니었고 정말 돈이 없었다면 도움을 요청할 곳은 많았지만, 수중의 돈이 내가 일해서 번 돈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격표를 보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살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지만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풍경을 보면 잠시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때 대출을 받아서라도 풍족한 예산으로 하고 싶은 여행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한다. 좁은 방을 벗어나 더 넓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면 생각의 폭이 훨씬 넓어졌을 것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속이기 쉽다. 색다른 공간으로 자기 자신을 유인함으로써 존재의 변화를 꾀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당신은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이 말을 제일 해주고 싶다. 의욕이 없고 우울한 날들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다 보면 이게 진짜 내 모습인 줄 아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나를 가장 힘들 게 했던 건 바로 그런 감정이었다. 다들 열심히, 재밌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멈춰있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그리고 이런 생각과 감정은 우울한 시간을 지나고 나서도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어 내 자존감과 자신감을 깎아먹었다. 내 진짜 모습을 회복하는 데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최근에서야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요즘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겨울잠을 한참 자다가 나온 곰처럼 일상의 모든 사소한 것들이 내 감각을 건드린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우울한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누리는 것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혹시라도 우울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면 내게 어떤 말이 가장 필요할지 생각한다.


존재의 미미함.

아무리 가볍고 작은 존재라도 있는 힘껏 땅을 차면 소리가 난다. 소리는 공기를 타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무언가에 닿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에 있다고 해도 우리는 각자 고유의 소리를 가진 존재다. 충분히 큰 소리라면,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반드시 듣는다. 우리는 여전히 이어져 있다.

이전 14화 [K에게] 에필로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