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볼샷

by 김혜원

크로스핏에 월볼샷(Wall ball shot)이라는 운동이 있다. 메디신 볼이라고 하는 무겁고 큰 공을 던져 올려, 높이 있는 타겟에 맞추는 운동이다. 오늘 와드에 월볼샷이 있어서 벽에 공을 던지고 있는데 코치가 옆에 와서 말을 걸었다. "혜원님, 공을 받을 때 스쿼트 하듯이 깊게 받아야 해요. 그래야 허벅지 힘을 이용해 높게 던질 수가 있어요." 어찌어찌 오늘의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코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그 말 때문에 고작 6파운드(3키로)밖에 안되는 공도 무거워서 팔 힘으로 깨작깨작 던지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지금 내 상태가 거기구나 싶어서.





나는 마음의 무게를 지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던 사람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소중한 친구가 자기가 정말로 슬펐던 기억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내가 도망가 버린 적이 있었다. 그 친구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알았다. 이 이야기는 내가 감당 못하겠구나. 난 그의 슬픔과 어둠을 껴안을 자신이, 아니, 더 정직히 말하면, 껴안을 마음이 없었다. '왜 나에게 너의 감정을 주려고 하는 거야? 나는 너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 않은데.' 정말 비루하지만 그 당시 나의 마음은 그랬다. 그래서 눈에 눈물이 차오른 친구를 앞에 두고 되도 않는 농담을 하며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렇게 그를 버려두고 집에 오는 길, 나는 벌거벗은 여자친구를 침대에 두고 섹스 전에 도망가버린 남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그가 그날 밤 집에서 정말 슬펐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만큼이나 타인의 작은 고통, 작은 무게도 나눠 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니 참 여러 과정을 거쳤다. 그 사건이 있기 전에는, 난 타인의 무게를 지는 척 연기를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척, 슬퍼하는 척 했다. 그래야 내 나르시시즘이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사건으로 내 기만이 박살나 버린 것이다. 그 순간 난 연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정말로 그의 슬픔이 내 마음에 들어올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고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 타자로 인해 내 마음이 진짜로 흔들린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있고나서 나는 공을 피해 다녔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었다. 내가 들어주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절절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건 때문에 난 누군가의 고통, 슬픔, 어둠, 삶의 무게를 질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책감과 허무주의에 휩싸였다. 그렇게 한참을 또 도망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소중한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잘해보고 싶었다. 그 시절 나는 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마음 때문이었을 테다. 난 그 친구의 슬픔을 다 지려고 했다. 그가 던지는 공을 필터도 없이 그대로 다 받았다. 힘도 없는 주제에 그 무게를 다 받아서 공에 깔려 주저앉기 직전까지 갔다. 그 시절 나는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아무런 대책도 저항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늪에 빠져 죽기 바로 직전에 사랑하는 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 늪에 빠져 그를 칼로 찌르던 시간, 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의 슬픈 눈이 기억난다.


오랜 시간 무게를 피해 다니다가, 또 한 동안은 무게에 깔려 주저앉았다가. 이제 나는 겨우 3키로짜리 무게를 나눠 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사실은 그마저도 힘이 없어 팔 힘으로 깔짝깔짝 던지는 바람에, 그 무게를 제대로 받아 멀리 되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너의 삶의 무게를 내가 나눠 져서 네 삶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너의 걱정, 너의 고통, 너의 슬픔을 내가 나눠 가져 네 삶이 조금이라도 기뻐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사랑은 노력이 아니라 역량이다." 그렇다. 내가 내일부터 당장 10키로짜리 공을 받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3키로짜리 공을 조금 더 깊숙이 받아 안아서 조금 더 멀리 던지도록 노력하는 것뿐이겠지. 허벅지 힘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기다리는 것밖에 할 게 없는 지금,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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