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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향 Mar 26. 2022

주택, 이맛에 산다

주택에 사는 맛

밤새 내린 비가 하늘을 깨끗하게 닦았는지 시야가 환하게 벗겨졌다. 햇살이라도 기웃거렸으면 무지개가 환하게 펼쳐졌을 만큼 비 개인 후의 공기는 기분이 좋다. 이런 날이면 다가오는 봄의 품에 안겨 가만히 멍 때리는 것도 이 시간을 즐기는 방법이다. 데크에 앉아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있는 싱그러운 향기의 주인공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가끔 찾아오는 새들의 노랫소리는 반전의 매력과 같다. 숨죽이며 기회를 엿보던 귀가 드디어 활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시야는 빠르게 주변을 스캔한다. 장미 가지에 앉아 화단을 향해 연신 인사를 한다. 그러더니 '휘리릭~' 화단으로 내려와 뭔가를 붙잡아 다시 담장으로 날아오른다. 입에는 어느새 벌레 한 마리를 물고 있다. 아침 일찍 움직이던 벌레는 날벼락을 맞는 순간일 테지만, 그 덕분에 새는 풍성한 아침을 완성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침은 또 생명 순환의 순리를 따르고 있다

이미지 :Pixabay

데크에 앉아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주택의 맛이다. 넓지는 않지만 좁은 가운데에도 생명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고, 자연은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고 찾아온다. 망각의 시간을 쌓아가는 사람들의 하루와는 다르게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길 건너에는 카페 오픈 준비가 한창이다. 주인 내외의 부지런한 움직임이 역동적인 삶의 단상으로 다가온다. 이제 곧 카페가 오픈하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늘어날 것이고 이 골목은 이전보다 더 분주한 일상이 찾아올 것이다. 데크에 앉아 여유를 부리고 있는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스친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백수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이미지 :Pixabay

지금은 잠시 쉬어야 할 때다. 지금 움직여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복층의 작은 건물을 하나 지을 예정이고, 마당과 담을 새로 공사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움직여도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다. 설계사에 의뢰한 도면이 나오는 대로 마당 한 구석에 작은 건물이 먼저 지어질 것이다. 그 후에 마당을 정비하고 담장을 새로 올리면 고치며 사는 집의 올해 할당된 굵은 계획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몸이 근질거려도 잠시 쉬어가야 할 때다.


예전 같으면 화단을 새로 단장하고 씨를 뿌렸어야 할 시기다. 그런 시기에 이렇게 무료한 주말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평일에는 직장 때문에 시간이 없지만 주말에는 늘 뭔가 움직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도마라도 만들고 싶지만 오늘은 그냥 게으른 하루를 오롯이 누려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여유로움으로 봄을 만끽하며 호흡마다 자연의 싱그러움을 누려봄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미지 :Pixabay

커피를 내려 다시 데크에 앉아 여유를 마신다. 그런데 할 일은 쉬지 않고 눈에 들어온다. 화분에 심겨진 장미들이 어느 틈에 새순이 파랗게 솟아올랐다. 죽은 가지들을 잘라주고 손봐줘야 5월의 화려한 여왕으로 거듭날 것이니 말이다. 마당 끝에 지난주에 잘라놓은 목련도 애처로운 모습이다. 목련나무가 너무 커서 잘라만 놓고 시간이 없어 방치했더니 해야 할 일이 되어 돌아왔다.


생각이 시간을 따지는 사이에 커피는 바닥을 향했다. 오후의 시간표가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그렇지 뭐. 주택에 사는 맛은 여유를 부리는 맛이 아니거든!!'

캠핑족이 캠핑을 하는 이유는 그 과정을 즐기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에 사는 맛도 역시 캠핑의 맛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고치며 살아가는 과정을 즐기는 맛이기 때문이다.


커피 향기가 달아난 빈 잔이 보인다.

여유를 누리는 시간은 이제 커피 향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또 해야 할 일들이 시간표대로 찾아온다.

오후에는 바람이 불거라는 일기예보가 있다.

어쩌면 좀 더 서둘러야 할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 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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