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은 중년의 나이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사회 통상적으로 중년이라 하죠. 보통의 선배들도 삼십 대에 대한 이야기는 해도 사십 대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도 내게 마흔이 이런 나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30대, 40대, 50대의 삶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그 나이 때마다 늘 힘들기 마련이다. 삶은 미완의 과정을 통과한다. 미완성인 나를 완성으로 이끌 뿐이다. 삶은 어차피 완전한 행복도, 불행도 없다. 어느 나이대에도 시련은 찾아오고 나이 듦과 상관없이 아프다. 힘든 순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마흔의 나이를 크게 생각할까?
인생의 제2의 사춘기라 부르기로 하는 나이 ‘마흔’, 어른들이 흔히 방황기라 부르는 시기이다.
이렇게 부르는 의미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그러하듯이.
굳이 마흔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세 시대를 사는 지금의 우리는 절반을 살지도 못한 나이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민을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생 초년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년기에는 인생이 혼란으로 가득하다. 혼란이 시간이라는 물살에 흘러간다. 거세었던 물살이 점점 잦아들고 어느덧 잔잔하게 흐르게 되는 시기가 올 줄 알았으나 그것은 물밑에서 언제 솟아오를지 모르는 상태인 것 같다.
더욱이 요즘은 결혼도 늦어지고 있고, 아이도 늦게 낳고 있다. 나 또한 마흔에 쌍둥이를 낳았다. 마흔이면 안정된 삶이 보장되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부모와 베이비부머세대의 자녀들인 지금의 40대는 더욱 혼란스럽기도 하다. 부모를 부양하게 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 부양을 받지 못하는 첫 번째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의 노년에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자녀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까. 최근 기후 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나오기도 했다. 이제는 자연도 우리의 편이 아니다. 환경까지 생각해야 하는 첫 세대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지금의 마흔들은 내가 느끼는 불안을 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 초년 때보다는 한층 연륜이 생겼지만 자신이 했던 노력들이 열매를 맺어 익어 따 먹을 줄 알았는데 벌레들의 습격으로 수확량이 줄어 수익이 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지금의 마흔은 그런 것 같다. 한 곳에 안주하려다 살 수 없어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나는 이들이 많은 나이이기도 하다. 더 늦으면 시도조차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부부도 그런 상태이다. 익숙했던 곳에 안주하고 싶었으나 마음에 고름이 생겨 짜내고 다시 새살이 돋아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쌍둥이들을 열심히 키우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마흔이 축복의 나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대신 세상을 보는 시선을 다각도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해질 좋은 준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구나 겪는 사십춘기, 즐기면서 보내보자. 사춘기도 잘 보내면 한층 성장하듯 사십춘기도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