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가 끝난 거실과 안방.
햇빛이 텅 빈 바닥에 네모난 창을 그렸습니다. 햇빛이 많이 들지 않는 거실이지만.
먼지 한 점이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는 게 보였죠. 낯설고 조용했습니다. 금새 다른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를 할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은 비워진 공간이 되겠죠.
무언가가 사라진다는 건 이렇게 공기의 결이 달라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
벽에 기대 있던 물건들이 사라진 자리.
그곳에 이제 부드러운 빛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과일을 준비했고, 저는 천천히 바닥을 닦았습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기억은 선명합니다.
장난감 부딪히는 소리.
아이의 웃음.
서랍 여닫는 소리.
그리고 가끔의 한숨까지.
이제 그 자리에 ‘침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화로웠죠.
“이상하지 않아? 너무 조용해서.”
제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난 오히려 더 좋은데..”
남편이 창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오래된 피로 대신 묘한 여유가 비쳤습니다.
정리 전에는 물건이 너무 많아 숨이 막힐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공간이 너무 비어 잠시 허전했죠.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그 허전함 속에서 서로의 존재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
거실 한가운데.
이전엔 소파, 박스, 책, 장난감이 빽빽했던 곳. 한동안 정리한 공간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 안에서 ‘우리’가 보이는 것 같았죠.
“이상하게...”
제가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비워두니까, 오히려 대화가 되는 것 같아. 속이 시원해.”
남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아. 공간이 말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들었습니다. 서로의 숨소리. 찻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 창문을 스치는 바람.
시계 초침의 움직임.
그게 우리 대화의 새로운 리듬이었습니다.
정리 이전에는 ‘무엇을 더 채울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이 고요를 어떻게 지킬까’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방 한쪽, 베란다 한쪽, 여전히 손대지 못한 박스들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 책상 옆엔 정리되지 않은 책 더미가 있고, 옷장 안에는 언젠가 다시 열어야 할 계절이 접혀 있죠.
그래도 이상하게, 그 미완의 풍경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직 남은 일상’처럼 느껴졌습니다.
정리가 다 되지 않아도, 이제는 그 안에서 함께 쉬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워진 공간은 생각보다 많은 말을 합니다.
“괜찮아. 이제는 이렇게 살아도 돼.”
“조금 덜 가져도 충분해.”
“이 조용함 속에도 사랑은 있어.”
그날 밤, 남편이 거실 불을 끄기 전 말했습니다.
“이 집이, 이제야 우리 집 같아.”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이제야 좀 숨 쉬는 것 같아.”
"이렇게 비워진 공간이 오랫동안 유지 되면 좋겠어."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그 비워진 공간을 향해 조용히 같은 마음으로 미소 지었습니다.
정리는 끝났지만, 아직 정리해야 할 마음과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 미완의 여백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은 그렇지 않은데 저만의 생각일까요?
비워진 공간은 이제 우리의 마음이 쉬어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서 우리는 다시, 서로를 발견합니다.
완벽히 비운 공간이 아니라, 아직 남은 것들과 함께 숨 쉬는 공간이 되어갑니다.
다음화 <서로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