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연일 확진자 1,000이라는 비운의 숫자가 위험 신호를 알린다. 물리적 거리 넓히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사회. 자조적 탄식과 안타까움의 눈길이 교차되며 겨울이 더욱 냉혹하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으며 암울한 시간의 기억들을 덮어보려는 시도가 허사다. 잠깐 행복했다가 금세 슬퍼지는 나날들. 블루문이 온 공기를 덮어버린다. 우울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안간힘들이 아프다.
병원을 갔다가 전철을 탈 참이었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를 지나치는데 크리스마스 트리의 알록달록한 전구며 흰 눈 나린 핑크빛 트리의 찬란함이 무색하다. 감흥없는 이들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만이 가득하다. 상인들의 어두운 시름들만 너울댄다. 옷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선 곳을 지나치며 옷장 속 옷들을 복기해본다. 외투들이 오랜 시간을 묵혀서 보온 기능들이 소멸되다시피 했다. 필요하면서도 쪼막손이 되어 선뜻 쇼핑을 하지 못한 지 오래구나 싶어 쓴맛을 삼킨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지며 기웃기웃 눈길을 흩어 놓았다.
내 동선을 유심히 보던 상인 한 분이 나를 포획했다. 막무가내로 끌고 들어가서 립서비스를 한없이 날린다. 내게 맞지 싶은 옷들을 이것저것 입혀보며 기꺼이 흥정해주려한다. '싸구려 바지 두 개 달랑 팔고 여지껏 공치고 있다'며 읍소에 가까운 신음을 질러댄다. '아, 나 분명히 마음 약해서 넘어갈 텐데. 들어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녀의 승리, 그녀는 현금자동지급기 앞으로 나를 이끈다. 홀린 듯 출금해서 지급하고 돌아서려다가 또 하나를 만지작 만지작.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그녀는 마구잡이로 입혀보고 연신 '좋다, 좋다.'
눈물겨웠다. 그 절박함이 남의 일 같지 않았고 저렇게 열심인데 싶어져서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거다. '욕실에 물이 새서 내일 당장 수리비 백오십만원을 지불해야 하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잠깐 순간에, 온갖 상념들이 건너다닌다. 불현듯 떠올랐다. 곧 지급될 상금이. 한 해 기를 쓰고 산 내게 이 정도도 안 되나? 사치를 위한 일도 아니고......' 내 행동을 정당화할 이유를 적어도 몇 개는 찾아냈다. 캐시미어와 다운의 조화는 내 마음을 완전히 녹였다. 살이 급격히 찌면서 맞는 옷에 몸을 맞추는 지경. 이렇게 똑 떨어지게 맞을 수 있나? 다소 위안이 되었다. 그녀가 너무 간절했잖아? 잘했다, 잘했어. 경기가 좋을 때도 나는 시장에 무수히 널린 옷들을 보면 맘이 짠했다. 저 많은 옷들이 팔리지도 않고 쌓여 있으면 얼마나 답답할까?
라디오 가요 프로그램에서 자영업자들을 위로하는 '자영아, 힘내' 코너를 몇 번 들었었다. 가슴 시린 사연들이 가득이었다. 막 폐점을 앞두고 그나마 노래 한 곡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사연에 숙연해진다. 밥벌이의 숭고함을 절절하게 느끼는 순간들. 청취자들은 격려의 댓글로 백짓장의 무게라도 덜어주려고 서로 말을 잇는다. 몇 십년 운영하던 가게를 접는 심경이 오죽할까? 우리 카페도 카페로서의 기능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고 그나마 꽃을 찾는 분들, 책을 주문해주시는 분들로 해서 난방비를 벌충한다. 제 일처럼 걱정하면서 일부러 동선을 돌아 테이크 아웃이라도 해주시는 선한 이웃들이 있다.
그뿐일까? KPC를 합격하고 수기 공모 당선되었다는 철없는 자랑질을 기뻐해주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SNS 상 가벼운 만남이고 돈 안 드는 말 뭐 그깟 축하 못할까?라고 허투루 여길 이들도 있겠지만, 단언컨대 그조차 직접적으로 댓글로 표현하는 거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 일주일에 적어도 두 개의 글, 심지어는 매일 써댈 때도 있었다. 삶의 보고서처럼 때로는 강의나간 얘기, 시시한 이야기, 카페를 홍보하는 얘기, 여행 간 얘기 등 무작위로 써댄다. 몇 년 페이스북 생활하면서 관찰해본 결과, 누군가 진실과 마주하여 나약함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아낌없이 응원을 쏟아낸다. 또 아주 작은 일이어도 기쁜 소식을 전하면 기꺼이 반응한다.
내 현실 세계의 친구들이나 지인들 중에 SNS 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내 페친의 대다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가 되거나 그저 인사나 나눌 뿐이었던 분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더 친밀해졌던 정도다. 어쩌면 막연하고도 느슨한 연대로 만나진 인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 친구 관계를 유지하지만 별 교류가 없었던 분들 중에도 유독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축하를 건넨다. 앞선 자랑질 두 글에 좋아요가 350개 댓글 110개, 좋아요 400개에 댓글 112개가 달렸다. 좋아요와 댓글 수를 연연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 수에 담긴 따뜻함의 정도와 크기를 본다. 코로나 정국으로 각박해져가는 안타까운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인을 향하는 선(善)으로의 향상성에 대해서 말하는 거다.
코로나 정국이 장기화되며 심리적 우울감이 심화된다. 내면의 성장을 돋우는 귀한 시간으로 선용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우울감으로 하루하루가 힘겨운 이들이 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고통으로 자칫 과거에 묶이기 싶고, 현실의 무게에 치여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허덕인다. 지금 이 자리 일상의 감정이 평온하기가 쉽지 않다. 그 와중에 단비처럼 건네오는 격려나 다정한 인사는 생기를 불어넣는다. 섬처럼 누구나 외롭고 지쳐있지만 바닷속 심연에는 서로 서로 손을 잡고 있다는 안도감에 다시 주먹을 쥐어볼 힘이 생긴다. 시간을 갈취 당하고 공간을 점령당해 상실감에 젖어도 여전히 미소짓고 마음의 여백을 가지는 일을 선택할 수 있다. '감응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 나를 살리고 그도 살리는 일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나날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