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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가든 Apr 10. 2021

오렌지 향기

추억의 달콤하고 신 맛

사과 한 봉지를 샀다. 혀에서는 달고 코에서는 꽃향기가 난다. 와락 달려드는 기대하지 않은 사랑스러움.
“이거, 우리가 호주 가서 처음 먹었던 사과맛 같지 않아?”

“글쎄,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남편은 공감인지 아닌지 모를 대답을 한다.
   
97년에 그 나라의 대표 마트였던 울워스에 가보았다. 과일 코너에는 사과나 오렌지를 작은 산봉우리처럼 쌓아놓았다. 사과도 여러 가지여서 칼로 깎기도 힘들 만큼 퍽퍽한 것이 있는가 하면, 연한 분홍색 껍질에 향기가 좋고 과육이 연한 것도 있었다.

마트에 갈 때마다 몇 개씩 사 오곤 했는데 계절이 바뀌면서 사과 자리에 오렌지가 새로운 산을 이루었다. 날씨가 온화하고 햇볕이 좋아서인지 과즙이 무척 달고 상큼했다.

   
쇠고기가 싼 편이지만 매일 먹고 싶은 음식은 아니었다. 늘 시간에 쫓기던 우리는 아침식사로 대개 빵을 먹었다. 동그란 빵을 반으로 갈라서 한 면에 버터를 바르고 다른 쪽에 과일 잼을 발랐다. 곁들여지는 계란 프라이와 커피, 그리고 언제나 빠질 수 없는 것은 주먹만 한 오렌지 두 개였다. 한국인이 김치를 빼놓지 않듯 오렌지가 그랬다.


오렌지를 막 잘랐을 때 코에 느껴지던 향을 잊을 수가 없다. 두꺼운 껍질에 싸여있던 과육이 향을 탁 터트리면 나의 후각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동모드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꼭 미소를 지었다.


오렌지 향에는 유학생활의 긴장감과 쓸쓸한 추억이 함께 따라왔다. 밤을 꼬박 새워 과제물을 타이핑하던 때, 당시 30대였던 나는 밤을 새운 다음 날은 손가락이 가늘어졌다고 느낄 만큼 몸은 피곤했지만 밝아오던 새벽하늘의 푸른 색감은 너무나 신비로웠다.


가끔은 깻잎에 싼 삼겹살과 얼큰한 콩나물국이 생각나고 같은 언어로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노래를 흥얼대며 걸어오던 캠퍼스 뒤편 언덕길, 어느 집 마당에는 시도 때도 없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뉴캐슬대학 근처의 마리스트리트. 아들을 데려오기 전 첫 번째 가을과 겨울을 거기서 지냈다. 특별한 난방시설이 없는 그 나라의 특징 때문에 천정이 높은 집은 추웠다.

단열재를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아파트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붉은 벽돌집 마당에는 잔디가 무성하게 자랐지만 그 나라의 기후에 익숙지 않은 유학생들은 전기장판을 깔고 보온을 유지했다. 실내공기를 덥히기 위한 것은 작은 온풍기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런 아침에는 뜨거운 물을 끓여 커피를 만들고 빵을 구워 집안에 버터 냄새를 풍겼다. 그 냄새가 기분을 밝게 해 주었고 밤새 썰렁했던 실내를 사람 사는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대학도서관에서 과제를 준비했다. 도서관 입구를 지키던 오래된 부겐빌레아 나무는 자주색 꽃송이를 가득 피웠다. 가벼운 꽃잎들이 바람에 떨어져 이리저리 굴려 다니곤 했다.


 점심은 학교의 카페테리아에서 먹는 날이 많았다. 그레빌레아 나무가 신비스럽고 길쭉한 꽃을 피우던 화단을 지나고 경사진 풀밭을 걸어 내려가면 평지에 카페가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그곳의 고기 파이를 즐겨먹었다. 서양 음식이 풍기는 강한 향신료 냄새가 좋았다.  하지만 너무 짠맛과 고기 냄새에 지쳐갔다.


우리는 양파와 감자, 브로콜리와 양송이버섯, 붉은 파프리카를 넣어 만든 야채 볶음밥이나 직접 담근 배추김치로 만든 김치볶음밥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밝은 날에는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는데 부드러운 햇살이 머리와 어깨로, 온 천지로 반짝이며 쏟아져 내렸다. 입안 가득 퍼지는 오렌지맛이 새로운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오렌지는 나에게 달콤하고 신 추억의 맛이다. 새로운 곳에서 도전하고 열중하던 젊은 시절, 천정 높은 렌트하우스의 서늘한 아침을 기억나게 하고 햇빛 부드러운 잔디밭에서 짧지만 평온했던 휴식이 큰 위로였던 때를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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