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저귀를 떼지 않아 불룩한 엉덩이에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은 걸 보면 아이는 만 두 살이 안 된 듯하다. 머리카락은 한 줌으로 묶어서 정수리에 세웠다. 그 모양이 고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떠올리게 한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약해진 분수처럼 살짝 휘어졌다.
내가 서점에 가는 날과 그 아이가 가는 날이 우연히 같은 것인지, 아이의 일과 중 서점에 놀러 오는 시간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이와 종종 마주친다.
아이는 어김없이 장난감 부스 앞에서 멈춘다. 빙글빙글 천천히 돌아가는 그것은 아이를 끌어당기는 힘이 세다. 판다 곰이 원더풀 라이프라는 글자판을 바퀴에 단 채로 공중자전거를 탄다. 마차는 나무로 만든 성 주변을 빙빙 돌고 모자를 쓴 남자가 수레를 타고 간다. 덩치 큰 검은색 곰이 아슬아슬하게 철봉을 하는 그 장난감 부스는 실로폰 연주음을 퐁퐁 흘려보낸다.
이 모든 것이 어른 키보다 높은 사각 플라스틱 부스 안에 들어가 있다. 작은 공간은 옅은 노랑으로 빛나는 동화 속 나라다.
아이는 신이 나서 알 수 없는 소리로 재재거리다가 장난감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한다. 짧고 통통한 집게손가락을 펴서 움직이는 그것을 가리키며 뭐라 한다. 단어로 자라지 못한 아이의 신호에도 옆에 서 있던 엄마가 흔쾌히 장단을 맞추어 대답한다. 엄마와 아이만이 알아듣는 언어다.
어린 아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아기들은 하늘나라 천사였다. 인간 세상으로 온 후에 하늘나라의 비밀을 누설해 버릴까 봐 창조주는 아기들이 한동안 말을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말을 못 하고 사람의 말을 배우느라 듣기만 한다. 갓난아기일 때 뭔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것도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이란다.
아이는 부스 앞에서 언제나 신이 나고 흥분해 있다. 작은 심장이 더 팔딱거리고 까만 눈망울은 반짝인다. 분홍색 입안에는 침이 가득 고인다. 아이는 엄마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한다. 아이 엄마는 키가 훤칠하고 활기차다. 엄마들에게 종종 배어있는 지친 모습이 없다. 엄마는 꼬맹이의 넘치는 활력에 다 응답해줄 여유가 있다. 사실 엄마인지 이모인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교감하는 것으로 보아 엄마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장난감 주위를 두세 바퀴 돌고서야 아이는 토닥토닥 발소리를 내며 다른 코너로 향한다.
지난 몇 주간 그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잔잔한 기쁨으로 차올랐다. 책 읽기에 빠져있다가도 문득 들려오는 아이의 소리에 얼굴을 든다. 오늘도 행복한 천사가 오셨구나. 보이는 모든 것이 경이로울 아이의 표정을 본다. 뚫어지게 바라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싶어 하는 어린 천사의 얼굴을.
아이에 대해 이토록 감동하는 이유는 아들을 기를 때는 그 애가 천사였는지 몰랐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꽃이 지고 나서야 그때가 봄이었구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기 적 아들 얼굴은 울거나 웃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엄한 표정으로 야단을 쳐도 웃으며 바라보았다. 혼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이는 배운 적이 없다. 젊은 때는 자식 귀한 것을 절실히 알지 못했다. ‘우리 아들 언제 크나‘ 하는 말로 얼른 사람이 되라고 독촉하기도 했다.
90년대였다. 두 돌이 채 안 된 아들을 시부모님께 맡기고 나는 남편과 호주로 갔다. 학업을 위해 직장을 휴직하고 떠나게 되었다. 시부모님은 1년 동안 아이를 맡아 키울 테니 자리가 잡히면 데려가라고 했다. 고민하고 다시 고민했다. 낯선 남의 나라, 어린 아기를 데려가서 육아와 학업을 병행하기는 어렵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들을 두고 떠나던 심정을 잊지 않으려 했다. 향수병과 같은 슬럼프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어린아이를 두고 온 엄마라는 자각에 다시 힘을 내곤 했다. 내게도 아들에게도 외로운 1년이 지났다.
아들이 왔다. 그곳에서는 한 여름이던 1월이었지만 떠날 때 한국은 추운 겨울이니 내복을 입고 왔다. 세 살 짜리는 마당에 늘어선 팜나무 그늘 아래서 폴짝폴짝 뛰며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까지 있으니 좋았던 모양이다. 나무둥치 사이로 비스듬히 아침 햇살이 내려왔다.
헤어질 때 겨우 한두 마디 말을 하던, 웃을 줄만 알던 아기는 아이로 자라 있었다. 어른들과도 말이 통하는 명랑한 꼬마가 되었다. 다시 만난 나에게 처음 한 말이 “고모, 좋아요...... 아니, 엄마.”였다. 고모는 한국에서 자주 만나던 고모 뻘 되는 친척이다. 그 호칭이 입에 뱄던 것이다. 아들을 안아 올리며 미안함에 마음이 더욱 아렸다.
한국에 있을 때 아들은 가끔 이유 없이 악을 쓰며 울었다고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어렸기에 잘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엄마가 보고 싶어 그랬던 건 아닌가 싶었다. 아들은 언제 떨어져 있었냐는 듯 부모와 잘 지냈다.
우리가 학교에 가는 낮 동안에 아들은 유치원에 다녔다. 대학교의 담장 너머에 있는 유치원으로 데려다주고는 도서관에서 종일 과제에 매달렸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말이 안 통하니 울기도 했다. 어린것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게 잘하는 짓인가 고민이 되었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아들은 몇 주간의 힘든 적응기를 이겨냈다. 아이들끼리 서로 말이 통하면서부터였다. 하얗거나 검은 서로 다른 피부색에도 익숙해진 것이다. 어느새 또래집단의 유대 같은 것이 생긴 듯했다. 저녁에 데리러 가 보면 유치원 마당에서 서로 웃으며 즐거운 놀이에 빠져있곤 했다.
지금 물어보면 아들은 그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한다. 낯선 환경이 두려워 울던 기억도 친구를 사귀어 재잘대던 추억도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 세 살 적 일을 누구나 기억하는 것은 아니니 그럴 만도 하다.
괜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그때 부모와 완전히 떨어져 지낸 1년이 아이를 외롭게 하지 않았나 자책이 되었다.
우리는 지나고 나서야 ‘그때 이랬었다면’이라고 가정하며 한숨을 쉰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젊을 때는 아기가 천사라는 것을 모르고 얼른 어른이 되어 제 몫을 하기를 바랐다. 이제 그 아기가 사람 노릇을 하게 되니 천사였던 그때를 떠올린다. 삶에는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일이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