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과 소멸은 인공물이든 비 인공물이든 모두 가진 객관적 사실이다. 인공물의 경우, 의도적 장치, 이익 중심의 사고라 분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 앞이나 물에 닿게 두지 않아도, 색은 바래지고, 기능은 느려진다. 세포가 생생하다가 느려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소멸을 맞이한다.
죽음이란, 전환점 이후 물질적 육체적인 모든 것을 지닐 수 없는 상황이다. 죽음이란, 숨이 멈추고 심장이 멈추면서 물질적 육체적 기능의 상실, 정신적 기능이 정지한 상태이다. 그러니, 평생 최선을 다해 손에 쥔 것을 놓는 것이다. 기능이 정지했기 때문에 잡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윤회를 말하는 종교에서는 이승에서 얻은 것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 말한다.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편해지고 고요하고 어쩌면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매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고 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최선을 손이 오그라져도 남김없이 투자하려고 한다.
그 반대의 이야기도 있다. 결과물의 욕심을 접고.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은 꼭 챙기라고 한다.
이야기 속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나?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과정의 보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산출할 수 있는 성적보다 높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다. 적어도 어제의 성과보다 높은 성과를 획득하려는 이유다. 그런데, 과정에 만족한다니. 바람의 집중점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뿐이라니. 어만 곳에 정열을 쏟는 것은 아닌가? 심하게 말하면, 포기하고 시작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더욱이, 무엇을 했고 얼마나 획득했든 어차피 죽음에 이르고, 획득하고 얻고 달성한 그 어떤 것도 죽음 이후로, 영원히 보유할 수 없다면, 왜 최선을 다하는 것일까? 자기만족이 궁극의 목표점인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는 말로 피날레를 장식하려는 것인가?
우리가 생에서 최선을 다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승계, 유산, 물려줌을 위해서 인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발생하면, 삶의 주역이던 내가 자식을 위한 비료로 전환되기 때문인가? 여기서도 성실이 긍정적 행동으로 회자된다.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신을 위한 최선에서, 이어 살게 될 자식에게 최선의 방향을 트는 것이 내 입장에서 바른 일인가? 내 생의, 나를 위한 노력은 중단하는 것인가? 방향을 바꿔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보람을 느끼며 죽음에 이르는 것인가?
우리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도대체 죽음을 앞두고 왜 이렇게 달리는 것일까? 달리라는 것일까?
최선은 최고의 결과를 산출했을 때 붙는, 과정의 명칭이지 않나? 최고의 결과를 낳은 과정으로 정의한 후 붙이는 이름 말이다. 여기서 최고의 결과에 대한 절대적 수준치는 개인의 역량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여기서 잠시. 최고의 달성치가 개인 역량에 좌우되니, 세계 최고는 아닐 테니, 빈틈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자기만족인가?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사치다. 손에 쥔 것 없는, 흐뭇한 웃음이라는 사치. 지금까지 사치는 삶의 즐거움, 행복이라 정의됐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치는 사치인가 보다. 허황된 것인가 보다. 잠시 통증을 잊게 하는 모르핀인가 보다. 그런 속성도 있나 보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도 죽음을 앞두고 달려가는 것만큼 허망하다. 최선을 다할 때의 나는 언제나 지친 상태다. 필요하면 잠을 줄이고,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 시간을 줄이고, 가족과의 시간을 줄인다. 어떤 이는 이로 인해 허망해한다. 그렇게 힘들고 허망하니, 최선을 인위적 인공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운명대로,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의 가치가 높아진다. 적어도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지치진 않을 것 같은가 보다. 그럼에도, 자연체로 살아가면서도, 타인에게, 어떤 물건에게는 휘둘리지 말라고 한다. 요리조리 피하여 흐름을 탄다는 말인가? 이 역시 지치는 일이 아닌가?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누구나 세계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 세계 최고는 낳은 결과를 평가를 통해 정한 상대적 순위일 뿐이다. 세계 최고가 된다 해도, 의식주 없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 세계 최고는 달성치의 정성적 표시다. 세계 최고의 의미조차 이렇다면, 왜 최선을 다할까? 죽음을 앞두지 않고, 영원한 삶을 산다고 해도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제보다 나은 결과가 나를 부유케 하고 즐겁게 하며, 이로써 즐겁고 행복감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결과는 실패에 가까워도 하얗게 태운 자기 시간에서 느끼는, 과정의 만족으로 흐뭇해지기 때문인가?
도대체, 죽음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 왜 이리 열심히 앞으로 달리는 것일까?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정의 만족은 또 무엇인가?
수많은 철인들이 고민할 만하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해방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했고,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이 유한하니 진정성 있는 삶을 살자라 했으며, 세네카는 고통의 끝이라 했다. 몽테뉴는 철학이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 하여, 철학적 사유를 통해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하면 삶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죽음으로 잊히고 사라질 것이니 현재를 최대한 의미 있게 살라 했다. 에픽테토스는 나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라 했다. 인용한 모두가 죽음이 종착인 유한한 삶을 사니 내실 있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했다 이해했다.
소멸할 대상들의 삶이 어떠해야 좋을지. 철인이 아닌 나도 생각한다. 어떤 삶이 중간 휴식이자 break time인 사치를 끼워 넣으면서까지 매달릴 삶일지. 자연체로서 힘을 뺀 삶일지, 아니면 후회 없는 시간으로 쌓아 올린 보람찬 시간일지, 그것도 아니면, 세계 최고를 달성한 시간일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싶게 허망하고 난해하고 골치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