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충격적인 죽음의 사건이 있었다. 교회에서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집사님이 계셨다. 같은 모임에서 활동을 하기에 가끔 가벼운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 식사를 하는 정도였다. 단둘이 속깊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어서 엄청 친밀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으나 몇 년동안 모임에서 만나고 인사하고 대화를하던 사이.
그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기 두 달여 전이었다. 우리는 한국어 봉사단 모임이 있어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날 따라 이 집사님은 기분이 좋아 보이셨고 바로 앞에 앉으셨기 때문에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를 하면서 많이 웃었다.
나는 나이 들어감을 느끼는 힘듦에 대해서 토로하였고 오십대 후반의 집사님은 갱년기를 지난 선배로서의 생생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깔깔 웃으셨다. 지극히 적나라하고 사실적인 표현들이 있어서 기도 막히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집사님은 전형적인 부잣집 사모님 스타일이셨다. 부유한 가정에서 어여쁜 외모에 자기를 잘 가꾸시고 장성한 아이들이 있으신 외국여행을 다니며 행복하게 사시는 분. 자세한 집안 사정은 알 길이 없으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화려했다.
가끔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떤 한사람의 아주 극히 일부분만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보여주는 대외적인 모습,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모습만. 그 깊은 속 사정은 잘 모르는 채로.
그런데 두 달여 후 카톡 단체방에서 이 집사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오십 대 후반이면 아직 죽음을 예상하기에는 요즘 시대에 젊디 젊은 나이가 아닌가?실로충격적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듣지는 못했으나 가슴이 쿵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는 황망한 위로의 대화를 몇 마디 나눈 후 이 일은 점차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집사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카톡 프로필 사진은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분은 나와 함께 한 반을 나눠서 격주로 수업을 했었기 따문에 가끔 짧은 일대일 대화를 하기도 했다. 때때로 이상한 기분에 젖어 이 분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넘겨보았다.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어느 외국에서 찍은 사진과 자녀 분들의사진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죽음은 미처 예상치 못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과 같은 차이로 가까이 있는데 우리는 인생의 다른 면을 애써 넘겨보지 않고 죽음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내일 어떤 불의의 사고가 생긴다면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는 건데. 그런 불길하고 요망한 생각은 아예 상상도 하지 않거나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한동안은 '임사 체험'이라고 하여 미리 유언장을 쓰거나 관에 잠깐 들어가보는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런 체험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죽음의 순간을 늘 떠올려본다면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삶이 더 가치있고 아깝고 소중하게 느껴지리라. 오늘 수업을 하고 점심을 먹고 딸기 라떼를 마시는 평범한 삶이 얼마나 간절하게계속 이어가고 싶은 일상의 조각들인지.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세상 모든 것들이 용서가 될 것 같다. 나에게 단 하루가 주어진다면 이 한 시가 아까운 시간에 누구를 미워하거나 혹은 처지를 비관하면서 과거에 사로잡혀 살아가겠는가?
하루보다는 여러 날이 남아 있다 해도 시간은 끊임없이 유수같이 흘러가고 문득 돌아보면 벌써 이만큼이나 와 있다. 헤아려보면 깜짝 놀라게 되고 믿을 수 없는 숫자의 나이에.
또한 죽음이 코 앞에 와 있다면 내 삶에서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일 죽게 된다면 오늘 누구와 만나서 무엇을 하며 어떤 하루를 보내고 싶은가? 바로 그것이 내가 진정 원하고 꿈꾸는 삶이 아닐까?
그러니 오늘 선물처럼 주어진 하루가 더없이 감사하고 애틋하다는 말 밖에는 더 덧붙일 문장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