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과외 인생

우리의 순간

따뜻한 순간이 모이면 행복에 이르겠지.

by 사각사각

아이는 오늘도 수학 숙제를 내게 내밀었다. 언제는 답을 알려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아예 아이패드 같은 기기를 건네며 나에게 직접 하라고 한다. 하아, 아이는 두 자리수의 뎃셈 , 뺄셈도 잘 못한다. 손가락이 열 개밖에 없어서 더하기도 빼기도 어려운 것 같았다. 열 개 외에도 손가락이 더 있다고 머리속으로 상상을 하면서 풀면 되는데.

아이는 영어 단어를 쓰고 나는 수학 문제를 풀었다. 배경음악으로 좋아하는 lemon tree 팝송도 틀어주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우울한 데 멜로디가 쿵짝 쿵짝 신나서 아이들이 좋아한다. 이 어린이는 그야말로 밝고 명랑해서 동영상에 나오는 동작도 기상천외하게 따라하곤 했다. 가사는 몇 군데 밖에 몰라도 춤은 잘 춘다. 아무래도 안무가가 되어야 할까.


알고리즘에 따라서 다음 곡은 memories가 흘러나왔다. 아이는 자연스레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타더니 노래가 좋다고 한다. 몇 번 같이 들으면서 노래를 따라했다. 아홉 살 아이가 성인 노래가 좋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이 고요한 순간에 수십년의 나이 차이를 넘어서 교감이라는 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부드럽게 공간을 흐르는 음악과 그루브를 타는 아이와 노래를 따라부르는 어른이. 햇살이 노랗게 비쳐들어오는 창.


난데없는 아이의 발언. "선생님, 영어 사람과 결혼하세요."

"뭐 나쁘진 않지." 이 아이는 항상 외국 사람을 영어 사람이라고 부른다. 영어를 하는 사람을 줄인 건가? 어린이들이 독특한 말실수를 하는 건 고쳐주기에는 참 귀엽다.

아이는 단어를 몇 개는 읽는 것 같은데 아직도 문장을 잘 못 읽는다.

어느 날인가는 아이에게 읽기를 은근히 종용하며 놀려 보았다.

"ㅇㅇ이는 영어 까막눈이네."

"난 까만눈인데." 더 할말이 없다.


그래도 춤을 좋아하니 영어로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마음대로 지어 부른다. 아, 웃기다. 영어가 단 하나도 안 들릴 때도 있다.

"ㅇㅇ이는 외계어를 하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들리는 대로 노래를 부르는 어린이.

무척 사랑스럽다.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똥머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하아, 어린이의 머리를 묶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긴 머리를 높이 묶어 올리고 다시 동그랗게 말아보았다. 하지만 아이의 머리카락은 기름칠을 한 듯 미끄러워서 잘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며 물고기처럼 놀랍도록 미끄러져 흐른다.

"똥머리가 아니라 그냥 모양이 똥이네. "

"아, 뭐라고요? "

하하. 누구 탓을 하랴. 똥손인 것을.


하지만 똥머리를 하고 다시 격렬하게 춤을 춰서 머리는 산발이 되어갔다. 수습이 불가하나 아이는 이미 머리보다는 자기의 끼와 몸짓에 도취된 것 같았다. 묘하게 평화로운 순간으로 기억될 하루. 오래도록 기억이 되지 않더라도 고양이 털을 쓰다듬는 나른한 오후 같은 따뜻함.

자화상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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