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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garden Aug 19. 2020

경단녀는 꿈속에서 취직을 한다

그것도 몇 번 씩이나


일과 나


일을 한지 7여년이 된 시점, 일을 그만두고 이름도 처음 들었던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토바고'로 갔다. 또각또각, 단정한 구두 소리, 깔끔하고 세련된 정장, 목에 두른 회색 줄의 출입증, 들고 다니던 가방의 가죽 냄새. 바쁜 일상 그리고 업무적 성취.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난 전업 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시간이 흐르니, 스멀스멀 직장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미련 없이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움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꿈은 내 무의식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다녔던 직장에 재취업을 하는 꿈을 꾸었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얼마나 돌아가고 싶은 거야?' 꿈을 깨고 난 뒤 나는 생각했다. 남편이 주재원으로 나간 경우라도 퇴직을 하지 않고 나가 있는 동료도 있었다. '나도 그랬다면 좋았을 걸'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APEC 기후센터에 입사했다. 일이 하고 싶어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러 한국에 왔다. 첫째가 돌을 막 지냈을 때다. 아이를 둘러업고 날아가듯 한국을 돌아와서 시험을 본 곳. 첫 번 째는 불합격. 두 번째 원서 낸 곳이 부산에 있는 APEC 기후센터였다. 시험에 합격하던 날, 좋은 꿈을 꿨다. 반짝이는 옷을 입고 현관을 나서던 꿈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워킹맘의 일상이 시작됐다.


APEC 기후센터, 제1기 워킹맘 시절 (부산, 2012)


다시 일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육아휴직을 하고 남편이 있는 자메이카로 갔다. 그리고 둘째를 가졌고, 복직을 앞두고 다시 한국에 온 나는 둘째 출산에 문제를 겪었다. 결국 아이를 살리고 키우는 데 온 정신이 집중되었고 복직은 하지 못했다. 아이는 수술도 잘 끝나 회복했고 의사 선생님은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다고 했다. 출산 후 1년이 지나서였다. 자메이카에서의 삶은 아이들과의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이었다.


우리집 수영장, 자주 아이 친구들을 초대했다 (자메이카 킹스턴)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욕심을 부려서일까. 평화롭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던 중에도 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일하는 꿈을 꾸고는 했다.




또 다른 면접 이야기 (망했지만 결코 망하지 않은)


작년 4월, 응시원서를 냈더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이 두 군데 있었다. 비행기로 갈아타는 시간까지 합하면 30시간 여 걸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왔었다. 남편은 직장생활을 하며 홀로 아이들을 2주 동안 케어했다. 동생은 시험 보러 한국에 온다니 가까운 곳에 호텔을 예약해 주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 면접에서 입을 옷을 주문해 호텔로 배송시켰다. 한국에 도착하니 저녁 6시였다. 면접은 다음날  1시. 그날 저녁에는 구두를 사러 아렛에 들렀고 호텔에 도착한 옷을 입어보고 모든 것을 세팅해 놓았다. 든든히 조식을 먹고 천천히 면접 준비도 해보고 떨리는 마음은 심호흡으로 다듬었다. 택시를 타고서 면접장에 도착했다.


최종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은 모두 4명. 다들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많게는 10살도 넘어 보였다. 수험 번호 2번. 31층 면접 대기실에서 대기하던 우리는 인사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계단으로 32층으로 이동했다. 인사담당자가 마지막 사람을 챙기느라 제일 늦게 올라오고 있었는데, 32층 문은 잠겨 있었다. 그때 수험번호 1번 아저씨가 자신의 출입증으로 보이는 것을 문에 갇다 대니, 띠리릭 하고 문이 열리는 것 아닌가. 그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이었다.


면접 때 분위기는 좋았다. 5명의 면접 위원들 앞에 홀로 앉았다. 예전 직장에서의 경험과 홍보 업무에 대한 지식에 대한 질문이었다. 블로그나 브런치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에세이를 쓰고 있다는 것이 자기소개서에 쓰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면접 위원장으로 보이는 중간에 앉은 면접관이 자메이카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것에 대한 질문을 몇 번 하더니, 계속 그쪽으로 일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다. '아니오, 전 이 일을 더 잘하고  좋아합니다만.' 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음 말로 넘어간 그는 합격하더라도 이 직급에 당신 나이는 어린 편이니 그런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나이가 어린 게 문제는 아닐 텐데, 직급에 대비한 나이를 따지는 면접 위원장이 못내 아쉽긴 했다. 그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다고 하며 마무리했다. 면접 위원장이 그렇게 말하니 아까 그 1번 아저씨가 떠오르며 '이거 망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후회 없는 면접이었다.


이틀 후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예비합격자. 2등이란 소리였다. 합격자는 그 수험 번호 1번 아저씨였다. 설마가 역시였다. 그리고 자메이카로 돌아가서도 6개월 추가 합격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데, 결과는 '꽝'이었다.


에잇, 난 들러리였던 걸까.




그 시간들은 모두 낭비이고 실패였을까.


30시간 비행기를 타기 까지, 갈까 말까를 고민했던 나는 여러 번의 일로 가야겠다는 결심 했다. 아무리 합격을 했어도 시험을 보러 한국까지 간다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었다. 아이 둘을 보살펴야 했었고, 남편이 일하면서 아이들을 케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먼 곳이라 비행기 값도 만만찮았다. 몇 년 만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요하는 그들 앞에 앉아 과연 그 일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망설임의 이유였다. 포기하면 마음 편할 일이었다.


남편과 한국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한 학생의 격려가, 그리고 말씀이, 그리고 꿈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자신의 꿈을 생각했을 때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너의 꿈이 아니다.'란 말과 함께. 이렇게 멋진 과정을 거쳐 한국을 다녀왔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을 다녀온 것이 우리 가이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된 계기가 됐다. 먼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가깝게 느껴졌고 돌아가기 힘들 것 같은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다시 용기가 났다. 그 일이 있은 후 2개월 후, 우리는 이방인의 생활을 접고 한국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알게 됐다. 때로는 실패가 동력이 되기도 하고, 살짝 용기 내어 본 발걸음이 미래의 향방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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