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초미숙아로 태어나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커리어우먼으로부터 멀어진 지 5년. 아이의 정상적인 발달을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기적 속에서, 감사함으로 살았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확신이 없었다. 다만, 도전할 뿐이었다.
정부나 공공기관의 홍보분야 채용 공고가 주르륵 뜬 적이 있다. 해외에 살고 있던 나는 동생의 도움을 받아 원서를 접수했다. 자기소개서와 직무수행계획서 같은 것을 썼다. 눈은 컴퓨터 보는 일에 생소해져 있었다. 세 시간 정도가 지나면 눈이 침침해서 도저히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원서를 냈더니 2군데에서 면접을 보라고 연락이 왔다. 남편과 상의했다. 면접을 보러 250여만 원의 항공비를 지출하고 아이들을 떼어놓고 30시간은 족히 가야 하는 원정 면접에 갈 수 있을 것인가 고민했다. 남편은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다. 아이들은 학교와 애프터스쿨 지원을 받으면 된다고 했다.
남편의 응원은 고마웠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내 안의 두려움이 느껴진 순간, "두려움은 당연한 거야. 네 꿈에 대해 생각할 때 두렵지 않다면 그건 도전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니까."라는 메시지가 내 안에 울려 퍼졌다.
2주간의 한국행. 떨리고 어려웠다. 그야말로 도전이었다. 그러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결과는 한 군데는 예비합격자, 또 한 군데는 불합격이었다. 결국 도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면접 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리고 도전해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이었다. 첫째, 나를 직시하게 됐다. 현재 변화된 홍보 분야의 환경에 비해 나의 것은 과거의 전문성이 되어버린 실상을 마주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관련 분야의 익숙한 용어들은 모두 과거의 것이었다. 둘째, 멀게만 느껴진 한국행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관성에 익숙해진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제는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라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 '글쎄'에서 '다시 하자, 다시 가자'로 뚜렷이 변했다.
실패는 또 다른 두려움을 낳기도 하지만, 그때의 실패는 나의 삶이 다시 방향을 틀게 되는 용기를 심어줬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원서를 냈다. 면접을 보러 간 경우도 있었고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국회의원실에 채용된 후 하루 만에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답을 한 경우도 있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고 거리 때문에 접어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반년은 훌쩍 지났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지원했던 곳에 최종 합격했다. 과연 한국에서 아이 둘을 키우면서 맞벌이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또 다른 도전 속에서 지금까지 워킹맘으로 일을 하고 있다.
다시 일하는 엄마로, 매거진을 발행한 지 일 년 반이 지났다. 그간의 글들을 보니 도전기도 있고 실패기도 있고 다시 일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했던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 누구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이 셋을 키우는 대학 동창이 물었다. "내가 과연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답했다. "내가 다시 했다면 그 누구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고. 작고 초라한 도전일지라도, 첫 술에 배 부를 수 없다 해도, 작은 물줄기가 모여 큰 강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도전들을 응원하고자 이 매거진을 더 채워야겠다.
그렇다, 다시 워킹맘 1년, 그간 있었던 변화를 써야겠다. 지금의 나를 위해, 또 다른 수많은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