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 Dec 05. 2022

축가의 저주

누나 잘 살아?

"누나 잘 살아?"

오랜만에 만난 현기가 안부를 물었다.

"내가 축가를 불러준 친구들이 알고 보니 전부 이혼했더라고. 누나는 잘 살고 있는지 궁금했어"

"나? 잘살고 있지" 

말은 안 했지만 나를 걱정하며 멋쩍게 웃는 현기의 하얀 이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결혼식이 코앞에 다가오고도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견디다 못했는지 웨딩 드레드 샵에서 전화가 왔다.

"신부님 일주일 후가 결혼식 맞으세요? 아직 드레스를 고르지 않으셔서 연락드렸어요"

그랬다. 결혼 날짜를 정해두고도 신혼여행지와 간단한 살림살이 외엔 준비한 것이 없었다.

"아 네. 곧 방문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의상을 전공하고 옷 만들기라면 지겹도록 했던 내가 정작 내 결혼식 드레스엔 관심이 없었다.

하루 날짜를 빼어 도착한 샵에는 선택할 드레스가 몇 벌 없었다.

이미 나의 취향 따위는 물 건너가 있었고 남겨진 드레스들 틈에서 최대한 빠른 선택을 해야 했다.

"제가 입을 수 있는 것만 보여주세요"

총 3벌의 드레스가 눈앞에 걸렸다.

재빠르게 스캔을 끝낸 후, 초록색 허리끈이 싱그러웠던 드레스를 골랐다.

고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5분. 


결혼식에 대한 어떤 로망도 없었다. 그냥 해치우고 싶었다.

드레스 투어니 메이크업 상담이니 하는 것은 하기 싫은 숙제일 뿐이었다.

당연히 웨딩앨범 촬영도 하지 않았다.

 

여러 벌의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공주가 된 것처럼 인위적으로 찍어대는 사진이 싫었다.

공주 촬영을 보고 있던 25살의 나는 웨딩앨범은 절대 촬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처럼 웃고 있는 결과물은 힘든 순간에 잘 못 나온 헛웃음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로 인해 결혼식에 대한 기대와 로망이 날아가게 된 건.

이쯤 되면 결혼식은 왜 하는 거냐. 

구색은 맞추고 싶었냐. 






테너인 현기가 흔쾌히 축가를 맡아 주었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무려 파트너인 소프라노까지 대동했다.

"나 시월의 어느 날에를 꼭 듣고 싶어"

이 말을 기억했던 현기는 고맙게도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귀가 닳게 들으며 만일 결혼을 한다면 내 결혼식에서 울려 퍼질 노래라고 상상하곤 했던 곡이다.

결혼식하면 떠올리던 십 년 묵은 단 하나의 희망사항이었다.

마침 결혼식도 10월이 아니냐.


'시월의 어느 날에'가 끝나고 곧이어 보너스로 '축배의 노래'까지 불러주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런 결혼식은 처음이다. 오페라에 온 줄 알았다'며 하객들이 탄성을 질렀다는 후문이 들렸다.


축배의 노래는 주세페 베르디의 1853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노래이다.
제1막에 나오는 이 노래는 여주인공 비올레타 발레리의 파티에 참석하게 된 주인공 알프레도가 친구 가스통의 권유로 비올레타에게 노래를 부르면서 시작하며, 여기에 비올레타가 답하면서 이중창이 되고 이윽고 모두 함께 부르며 합창으로 발전하는 화려함을 보여준다.
가사의 내용은 일종의 권주가로 술과 향락을 권유하는 경쾌한 노래이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

결혼식을 우습게 보던 내가 결혼의 신에게 혼나고 있는 걸까.

우리의 결혼생활은 어느새 두 번째 축가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술이 문제였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술이 따라다녔다.

즐기지도 않는 술을 사회생활이라고 마셔댔고 본래가 약한 사람이라 술을 마시면 술에게 넘어갔다.

하루하루가 위태로웠다.


그러던 차에 현기를 만났고 그런 안부를 물어오니 순간 무언가를 들키기라도 한 듯 머리가 띵했다.

'축가의 저주'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과관계가 없다 해도 축가를 불러 준 모든 커플이 이혼하고 만다면 무슨 법칙이라도 성립된 것 같은 불안감이 들 것이다. 






저주의 공식을 깨겠다고 결심했다,

단 하나 남았다는 이혼하지 않은 커플인 나는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다짐하나는 잘 지키는 내가 아니냐.

나까지 이혼한다면 현기의 축가는 완벽한 축가의 저주가 되므로 그것만은 막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누나의 결혼식 로망을 이루어 주었던 너의 축가에 대한 보답으로 누나는 잘 살 거라고.

앞으로도 많은 부탁을 받고 축가를 하게 될 현기에게 괜스런 부담 하나 내려놓게 해주고 싶다.

그것만은 누나가 막아주고 싶다.

그러니 마음껏 축가를 불러줘.

단, 축배의 노래는 빼고.^^








작가의 이전글 애착 이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