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와 짝사랑하는 선배에 빠져 있던 신입생은 자신의 몸이 서서히 부어오르는 것도 모른 체 실실 웃고만 다녔다. 이후에 맞이할 고통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먹고 마셨던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그제야 들여다본 몸은 이미 입학당시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런 몸으로 좋다고 먹고 다녔으니, 선배는 날 어떤 눈으로 보았을 것인가. 순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나를 먹고 마시기만 하는 후배로 기억하는 건 싫었다. 뚱뚱한 후배로 기억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물론 먹고 마시며 숱한 대화를 했던 우리는 당장 내 연애는 하지 않았지만 내 느낌엔 그도 나도 썸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사귀는 것도 아니기에 방학이라고 딱히 연락할 구실은 없었다. 눈만 떠도 허공에 그의 얼굴이 날아다녔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좋았다. 이런 게 바로 짝사랑인가.
남은 시간은 또 한 달이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몸을 추스르자 결심을 했다. 그간 나의 무식한 다이어트와는 달리 이번엔 운동이 추가되었다. 그새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지 잡지를 보면 표지엔 온통 다이어트 기사가 대문짝 만하게 타이틀로 올라와 있었다.
다이어트방법이라는 문구만 보이면 집어 들었다. 꼼꼼하게 읽고 싹둑싹둑 오려 장롱문짝을 게시판 삼아 온 방에 도배를 했다. 각종 운동방법과 순서, 음식의 칼로리, 다이어트 성공사례 등이 내 주위를 빼곡하게 채웠다. 남은 건 실행이었다. 음식은 살살 먹되 운동으로 지방을 태우는 것. 그렇게 지옥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는 다이어트 비디오가 처음 나온 때였는데 나의 멘토는 신디크로포드였다. 신디크로포드의 다이어트 비디오. 슈퍼모델이었던 그녀의 몸은 말라깽이가 아닌 적당히 잡힌 근육으로 보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 그녀가 나의 선생님이었다.
팔에서 시작한 운동은 복부, 다리로 이어졌고 모든 세트는 20회, 한 부위당 600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령을 이용한 팔운동 600번, 윗몸일으키키 600번, 다양한 스쿼트 동작 600번을 하고 나면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 몸도 그녀처럼 될 거라고 믿으며 참 부지런히도 따라 했다.
다이어트 비디오가 끝나면 바로 이어지는 실내 자전거 타기. 이 운동에는 티비가 곁들여진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티비를 보는 것이다. 드라마 2편 정도가 끝나면 다리가 후들거렸고 새벽까지 계속된 운동은 나를 지쳐 잠들게 했다.
낮에는 동생과 수영, 헬스를 다녔다. 쨍쨍 내리쬐는 땡볕 아래를 걸어 헬스장에 도착하면 러닝머신 위에서 한 시간을 뛰었다. 걷는 게 아니라 뛰었다. 그만큼 빨리 살을 빼고 싶었다. 이런 나를 두고 동생은 "독한 년"이라고 했다. 그래 맞다. 난 독한 년이다. 벌써 몇 년째하고 있는 이 다이어트를 이번 기회에 끝내 버리고 싶단 말이다! 독한 년은 헬스가 끝나면 시원한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는 첨벙거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땡볕이었다.
그 여름의 식단은 처음으로 원푸드 다이어트를 진행했는데, 어느 잡지에서 보니 바나나가 효과 있다는 내용이 보였다. 그 길로 일주일 동안 바나나만 먹겠다고 선언했다. 내 엄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나나 한 박스를 사들고 왔다. 여름날의 바나나. 가만히만 두어도 날파리가 꼬이던 달달한 바나나를 한 박스씩이나. 엄마의 말없는 격려가 무색하지 않게 질리도록 바나나만 먹었다.
이런 방법으로 다이어트를 한 나는 놀랍게도 20일 만에 8킬로를 감량할 수 있었다. 인간이 20일에 8킬로를 뺄 수 있다니! 그런데 놀라움도 잠시, 너무 단시간에 무리하게 뺐었나. 원푸드와 지옥훈련은 살을 빼주었지만 개학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에게 요요를 불러들였다. 그렇다. 먹방 신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굶으면 안 된다고 얘기해 놓고 빨리 빼고 싶은 마음에 또 일을 저질렀다.
심지어 이번에 찾아온 먹방신은 무서운 분이었다. 바나나로 깨끗해진 내 몸을 1주일 동안 정신을 못 차리게 사정없이 공격해 댔다. 피자,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눈에 보이기만 하면 입으로 가져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미친 듯이 먹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그리고 내 몸은 딱 10킬로가 불어있었다. 살을 빼기는커녕 20일 만에 8킬로를 뺀 내 몸은 오히려 2킬로를 추가시켰다. 그렇게 여름방학은 끝이 났다.
심한 자괴감에 빠져있었지만, 학교 생활과 인간관계에 재미가 있어서였는지 설레며 개학을 맞이했다. 가을학기라 날도 좋았고, 한껏 들떠 있던 나는 새로운 수강과목을 듣기 위해 강의실을 이동 중이었다.
저 멀리서 같은 과 선배들이 걸어온다. 반갑다. 개학하고 처음 마주치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방학 잘 보내셨어요?"
"넌 누구니?"
진짜 나를 못 알아봤다. 내가 누구라고 짧은 설명을 해야 했다. 이 충격적인 말 한마디는 나의 2학기에 자포자기 쓰나미를 몰고 왔다. 학기 중이라 금식을 할 수도 없었다. 인간관계에 먹을 것은 필수로 따라왔고 난 내 모습이 어떤지도 잊은 채 폭풍 식욕을 자랑하고 있었다.
"넌 살 빠지면 엄정화 비슷할 것 같은데, 살찌니까 이소라다"
어떤 동기가 눈치 없이 이런 말을 했다. 그래, 그 당시 머리까지 잘못 잘라 가수 이소라의 빡빡머리가 되었는데, 몸 상태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내겐 몸을 가릴 만한 검은 드레스가 없었을 뿐.
나의 있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자 학교 생활 중에도 먹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내가 나서서 먹는 것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매일 계속되는 루틴은 대충 이랬다.
집에 가는 지하철역 근처에서 호떡을 사 먹었다. 친구와 걸으며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와 호떡을 하나 더 먹었다. 돌아가는 길에서는 보이는 포장마차마다 들러 떡볶이를 먹고 김말이를 먹었다. 먹부림을 한참이나 부린 나는 그제야 배가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술이라도 마신 날은 더 가관이었다. 막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버스정류장에서 어묵과 버터 바른 토스트를 먹었고 집에 도착해서는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고 잤다.
과 모임으로 놀러를 갔었다. 사진을 찍어 주었던 선배가 과방에 사진 전시를 해놨으니 가보라고 했다. 특히 내가 너무 잘 나왔다는 귀띔을 해주었다. 설레는 마음에 과방에 가서 본 내 사진엔 짧은 머리의 40대 배 나온 아저씨가 눈까지 찢어져가며 웃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유행이라고 셔츠는 배에 꽂았니. 불룩한 아랫배가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슬그머니 내 사진을 빼내어 가지고 나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 수없이 결심하고 독한 년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했던 나의 다이어트는 산산조각이 나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