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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를 만나다

by 이다

수능을 끝낸 후 나의 모습은 뚱뚱한 스님이었다. 교복 상하의가 회색이었고 겨울엔 바지도 착용가능했기에, 일찌감치 교복 패션을 포기했던 나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거기에 남색 코트까지 더해지면 짧은 커트머리의 나는 누가 봐도 후덕한 스님이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이대로는 대학에 붙어도 갈 수 없어. 나에겐 딱 한 달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좋아 이제 시작이야! 난 이번에 반드시 성공한다. 입시 결과를 기다리며 살을 '쫙' 빼기로 결심했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단기간의 다이어트는 새로운 세계로의 입성을 앞두고 시작되었다.




결심은 좋았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예전처럼 하다가는 사흘도 못 가 먹방신이 다시 찾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없다. 남은 기간은 한 달. 그새 합격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진짜 다이어트만 하면 된다.


이번엔 먹자. 무얼 먹을 것인가. 굶지는 않지만 최소한으로 건강을 생각하면서 먹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메뉴는 밥, 김치, 멸치. 차리기도 간단하고 셋의 맛조합도 꽤 괜찮았던 탄수화물, 비타민, 칼슘으로 이루어진 식단. 지방은 철저하게 제외시켰다. 내 몸에서 당장 빼내야 할 것은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굶는 건 아니잖아. 굶어서 죽을 뻔했던 나는 이 정도의 식사에도 감지덕지하며 맛있게 먹었다. 물론 간식은 없었다. 한 달 뒤가 입학인데 간식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이냐고. 그것은 바로 춤이었다.


나의 고3시절을 버티게 해 준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를 따라 머리까지 싹둑 잘라버렸다. 티비를 볼 수 없어, 대표곡인 컴백홈만 겨우 들으며, 수능이 끝나면 맘껏 덕질해 주겠어를 외치고 있었는데, 수능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잠적을 했다. 그리곤 해체를 하겠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것이 이런 심정일까. 억장이 무너졌지만, 이미 14살 때,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더 큰 테러도 당해봤기에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더 이상 덕질을 못하는 대신, 그들의 춤을 추기로 결심했다.


서태지가 양현석의 팔 안으로 뱀허물 벗듯 들어가는 동작, 그리고 양팔을 옆으로 펼쳤다 오므렸다 하면서 다리를 살짝살짝 점프하듯 움직이는 동작, 마지막엔 엉덩이 흔들기로 마무리. 이 세 가지 동작을 컴백홈의 노래에 맞추어 한 달을 주야장천 춰댔다. 춤이라기보단 팔다리 체조, 전신 흔들기에 가까워서 더 춰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3월 2일 아직은 쌀쌀한 기운이었다. 처음 신어보는 어색한 하이힐과 블랙 정장팬츠, 하얀 쟈켓을 입고 당당히 입학식에 참석한 나는 정확히 10킬로가 빠져있었다. 머리카락도 자라 그새 단발머리가 되었다. 찰랑대는 머리를 휘날리며 가벼운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우하하하, 그 봄은 온통 나의 것이었다.




입학식을 마친 새내기들은 어느 강의실에 모여있었다. 곧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서먹하고 분주함이 흐르던 그때, 갑자기 후광을 몰고 한 사람이 교단에 나타났다. 사람에게 왜 후광이 나오지 생각하는 것도 잠시, 한순간에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는 바로 우리 과의 학생회장. 앞으로 신입생들을 이끌어 줄 선배였다.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뭐야 왜 가슴이 뛰는 거야.


그날 이후로 그의 얼굴이 잊히질 않았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마르고 적당한 몸집, 웃으면 하얗게 드러나던 새하얀 이, 적당히 그을린 듯한 까무잡잡한 피부. 짝사랑만 밥먹 듯해오던, 금사빠인 내게 대학입학과 동시에 날아온 그 선배. 그러나 나는 몰랐다. 이 짝사랑이 내 살을 위협하고 있었다는 걸.


선배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다. 선배들이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자욱하던 과방을 밥먹듯이 드나들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선배들을 붙잡아 밥을 사달라고 졸랐다. 1학년이 제 돈으로 밥을 사 먹으면 능력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곧 죽어도 점심은 얻어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1500 원하는 학생식당의 밥이 너무 맛있었다. 가뜩이나 굶어서 다시 그분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판국에 이것은 마약이었다. 특히 좋아하던 메뉴는 돈가스. 처음 먹어보는 식판 돈가스는 꿀맛이었다. 따끈한 수프와 간이 딱 맞는 돈가스 소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메뉴였다. 선배들과 친해지려고 점심을 얻어먹었지만, 한눈에 반한 그 선배가 점심을 사준다고 하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한번 더 먹으러 갔다. 돈가스만큼이나 그와도 점점 친해지고 있었다.




우리 과는 유달리 친목을 도모하는 분위기여서 수업을 마치면 30-40명씩이 모였다. 그리곤 학교 뒤편 허름한 식당으로 다 같이 이동을 해서 술과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김치찌개와 공깃밥, 그리고 두꺼비 소주. 연거푸 몇 번의 소주 파도를 타고나면 찌르릉 하는 속을 달래기 위해 공깃밥과 찌개를 허겁지겁 먹었다.


신입생들에게 반주의 맛을 알아버리게 한 저녁 시간이 끝나면 살아남은 이들은 2차로 이동을 했다. 속이 메슥거려 떠나는 이들이 있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있었지만, 난 선배를 한 번이라도 더 봐야 했기에 배가 불러 터져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2차로 가는 곳은 돈가스안주와 맥주가 흐르는 호프집. 한층 여유로워진 사람들은 삼삼오오 대화를 시작했다.


대학 생활에 대한 고민, 포부, 이어지는 개인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그곳엔 항상 그 선배가 웃고 있었다. 그를 보는 것만 해도 배가 불렀다. 그럴 즈음 항상 도착하는 돈가스 안주와 맥주.


"맥주는 비싸서 1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 먹을 수 있다"


당당히 살아남은 나는 이번엔 맥주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의 입맛을 사로잡은 돈가스가 내 눈앞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간간히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한다. 나도 대화를 한다. 그렇지만 내 포크는 어느새 돈가스를 집어 오고 있다. 옆에 놓인 갓 튀긴 막감자는 왜 또 이렇게 맛있는 거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이 접시가 비어버렸다.


"누가 안주를 벌써 다 먹었냐"


머쓱해진 나는 실실 웃기만 한다. 아 배가 부르다. 그런데 기분이 좋다. 내 앞에는 선배가 있고, 내 뱃속엔 돈가스가 있다. 아 행복하다. 처음 맞이하는 대학생활은 꿈만 같았다. 매일매일이 술과 안주의 반복이었지만, 내 옆엔 항상 그가 있었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는 사이 내 몸이 꿈틀대고 있었다. 야금야금 몸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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