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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공허함이 찾아오다.

<기분>

by 밍밍한 밍

퇴원 후, 그저 집에만 콕 박혀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꿉꿉함과 무더움을 친구 삼아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다니기 바빴다. 친구들과 형, 누나, 동생 등. 입원해 있을 당시 시시콜콜한 나의 연락을 받아주던 사람들과 오랜만에 마주하며 그동안 있었던 서로의 삶을 공유하기 바쁜 나날들.


퇴원 당일엔 17년 이상 알고 지낸 친구들이 저녁을 함께 먹어주며 퇴원을 축하해 주었고, 13년 이상 알고 지낸 친구들은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를 위해 링피트 어드벤처를 빌려주며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자신의 남자친구와 병문안을 한 차례 왔던 친구는 이젠 얼추 걸어 다니는 나를 보며 진짜 많이 좋아졌다며, 고생 많이 했다며 격려를 해줌과 동시에 일상의 것들을 공유해 주었다.

오랜만에 관람하는 클래식 공연을 보러 공연장에 발을 내디뎠을 땐, 그곳에서 근무 중인 동생이 밥과 구하기 힘들다던 런던베이글뮤지엄의 베이글을 건네주었고,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형은 그동안 무척이나 맘고생 많았을 텐데 이렇게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며, 넌 정말 멋있는 동생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텍스트로만 안부를 물어왔던 사람과 처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문화생활을 다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 내면 속 무언가가 확장되는 것을 이따금 느낄 수 있었다.


기재한 내용 외에도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과 재회할 수 있었고, 새로운 만남을 시직 할 수 있게 됐다.

'퇴원'이라는 것은, 어쩌면 내가 무의식 속에 가둬놨던, 억지로 동여 메여놨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갈망을 풀어주는 매개체가 됐다.




퇴원 날짜를 확정하고부터 시작된 구직활동. 채용 사이트의 스크롤을 열심히 내리고, 자판을 두드려가며 서류를 지원했다. 퇴원 후엔 구직급여를 신청하여 행여나 길어질 수 있는 구직기간을 나름 대비할 수 있는 채비를 하였다. 연속된 서류 탈락이라는 회신, 추측 속에서 단비같이 찾아온 면접의 시간들. 끝끝내 재취업이라는 문턱에 발을 내딛게 됐다. 다시 직장인의 신분으로 돌아가 혼잡한 출퇴근 길에 몸을 싣고, 주어진 업무에 울고 웃고 할 수 있는 날이 임박해 있다.

본가에선 다소 먼 출근길이기에 자취할 곳을 구했다. 앞으로 살 곳을 청소하고, 가져온 옷더미를 모두 빨아야 하는 턱에 며칠간 매일같이 세탁기를 돌리기 바빴다. 생활에 필요한 품목을 구비하고, 정리하고, 쓰레기를 버리고의 연속.

자취집으로 온 후엔 유독 더 여유 부릴 무언가가 없던 느낌이었다. 짐 정리, 택배 정리 또 택배 정리, 세탁, 청소, 자체 재활운동을 위한 헬스장을 알아보고, 서류를 떼고, 필름을 인화하고, 근 닷새만에 다시 기타를 잡아본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해 갈 무렵. 목표를 잃었다. 목표를 잃은 마음속 빈자리엔 공허함이 가득해진다. 그리고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왜 이러지? 아... 올 것이 왔구나. 한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것. 공허함은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밍님은 언제 힘들다는 것을 느끼세요?"

"전 공허함이 찾아올 때요. 근데 그 공허함이 어떤 전조 없이 훅 찾아와요."


그리고 지금 그 순간이 찾아왔다. 하필 목표를 잃은 그 찰나의 틈새를 비집고 공허함은 나를 찾아왔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공허함에 나는 휘둘리기 시작한다. 나의 온몸을 감싸도는 무기력함. 원인 모를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가만히 공허함을 마주한다. 이 또한 지나갈 시간과 감정임을 알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그것 앞에 하염없이 눈물만 솟구쳐 흐른다.

적막함만이 감싸도는 이곳. 어쩌면 공허함이 가장 좋아하는 환경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조금씩 공허함에 잠식되어 가며, 이제 눈물은 소리로 변해 흐느끼기 시작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공허함. 오롯이 내가 감당해 내야 하는 그것.




공허함, 정말 오랜만이다..
비로소 내가 사회로 나왔음을 실감하는 순간.




그리고 난 금세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아니 유연해질 것이다.

그래서 반갑다, 공허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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