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건 뭐건 어쨌거나 중요한 건 타이밍이라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다. 노력만으로도 안되고 운만으로도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사람 감정을 두고 하는 일에도 비켜갈 수가 없는 규칙 같은 것이다. 오죽하면 운칠기삼이라는 말도 생겨 났을까. 노력도 운도 모두 적절히 버무려져야 가능한 어렵고도 귀한 그것.
너무나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던 상대가 알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좋아하며 애타한다면 어떨까 하는 , 꽤 유치 찬란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상상이 상상만으로 끝나더라도 한 번쯤 해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에 생기가 돈다. 바삭하게 말랐던 잎사귀에 물이 내린 것과 비슷하게 촉촉하고 말랑한 마음이 깃든다. 그리고 아주 묘하게도 자신감이란 게 생긴다. 상대가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나 정도면 괜찮잖아 하면서.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이란 건 이뤄질 이유도 너무 많지만 이뤄질 수 없는 이유도 너무 많다. 그것이 착각이라 하여 손해 볼 것도 없고 착각이 아니라 하여 마음이 널을 뛸 것도 아니다. 감당해야 할 것은 언제나 적정 수준만 좋아할 감정과 사랑이 깊어져 어찌하지 못한다 해도 나를 잃지는 말자는 다짐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만날 일이 많았다. 좋아도 좋을 수 없었고 공평할 수 없는 감정이라 하여도 불공평한 마음으로 더 표현하는 건 반칙이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상대방은 똑같은 대화 방식으로 나와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 역시 평소의 나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그 시간에 충실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묘하게 평소의 말투와 엇나가는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당신은 너무 잘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맞을까요? 난 그냥 마음이 안 좋아요."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한 말이었지만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치 그의 태도가 나의 의견을 반대하는 것 같이 들렸고 그런 말은 이제 여기 이 자리에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바스락 거리고 서걱거리는 느낌은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그를 아는 지인정도로만 생각했다면 당신 잘하고 있지, 뭘 새삼스럽게 그래? 웃으며 받아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를 향했던 나의 배려가 단호히 거절 당해 부메랑처럼 돌아와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가 돌려보낸 부메랑에 맞아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가 난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시간이 흐르고부터 완벽히 부인하려던 감정 하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정말 나를 전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에게 나는 마음에 남아 지지 않은 아주 가벼운 사람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 거다. 참 아무것도 아닌 말일 수 있고 오히려 더 좋은 쪽으로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냐는 생각도 맞긴 하겠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나의 의견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나란 사람 자체를 밀어낸 행동이라고 받아들였다. 난 이미 그에게 감정적으로 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어차피 이기려고 버둥거릴 마음조차도 없었지만 감정 앞에선 마음이 약해지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인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인정하고 나면 편해지는 것들도 많았다. 그리고 배웠다. 감정을 식히는 일도 그리고 포기하는 일에도 상대방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뤄질 수 있는 수많은 이유보다 이뤄질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하나 더 생긴 느낌이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더 편안해졌다. 그를 다시 보게 된다고 하여도 담담하고도 덤덤히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더 온전히 눈을 맞추고 말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태도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인식하면서. 내가 좀 바보 같아 보였나. 너무 웃었나 하면서 스스로 못난 사람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 상황에서도 나름대로의 배려를 했다고 하면 난 참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거니까.
상황의 반전은 없고 오로지 변한 건 나뿐이었는데 그곳에 가만히 서 있던 나는 이미 모든 시간을 살다 온 사람처럼 , 모든 걸 알게 된 사람처럼 느긋해졌다. 그곳에 서 있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도 빛처럼 바람처럼 시간이 나를 대신해 움직여 준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이 아프긴 했던 걸 보면 내 마음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또 한 번 , 어른이 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