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조금은 더부룩한

by 미들

시계소리가 째깍대며 텅 빈 방안을 조금이나마 메운다.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어느새 시원해진 바람이 커튼을 흔들며 불어닥친다. 더위는 어느덧 물러가고, 반팔 옷을 입으면 추워서 몸이 살짝 떨리는 계절이 찾아왔다. 방금 읽은 소설의 여운이 잔잔하게 마음을 채운다. 책을 덮고 가만히 표지를 내려다 본다. 여름의 끝. 공교롭게도 이맘때쯤이다. 방금 헤어져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을 책속의 연인들을 생각한다. 방안은 어둡지만 불을 켤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사이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멍하니 쳐다본다. 무언가 음악을 듣고 싶다는 충동이 잠시 찾아왔지만 그마저도 귀찮아 가만히 앉아만 있다.


오래간만의 여유다. 최근 일이 바빠 이런 여유를 즐길 시간이 없었다. 마음같아선 누구라도 불러내 요즘 너무 바빠서 힘들었노라고 그동안의 노고를 토로하며 즐겁게 술잔을 비우고 싶었다. 여러 이름들이 떠올랐지만 연락을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움을 꾹꾹 눌러담는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몸을 뒤로 젖힌다. 책을 읽은 시간은 짧았지만 최근 통 쉬지 못한 몸뚱아리는 그조차도 버거웠던지 허리에서 비명을 질러댄다. 나도모르게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제자리에 꽂는다. 다음 책을 뽑을까 했지만 그만둔다. 침대로 돌아와 몸을 누인다. 눈을 감는다.


그녀가 보고싶었다. 목소리가 듣고싶었다. 침대 머리맡에 붙여둔 사진에 눈이 간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와 나. 문득 그리움이 사무치게 올라와 다시금 눈을 감는다.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나온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아무런 거리낌없이 목적도 의미도 없이 실없는 소리를 하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던 때도 있었는데. 왜 지금은 그녀에게 연락할 건덕지를 찾아 머리를 굴려대고 있을까. 이런 내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그녀와 헤어진건, 아니 멀어진건 이제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애초에 사귀지를 않았으니 헤어졌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그녀와 나는, 그러니까, 친구이상 연인 이하의 관계였다. 이 표현이 적합한것 같다. 친구 이상 연인 이하. 그녀와 나 사이에는 연인관계의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보통의 연인들처럼 웃고 떠들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우리는 스스로부터 서로를 연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에게도 내가 필요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지 않았다. 속삭일 수 없었다. 아니,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을 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떠났다.


갑자기 술이 생각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냉장고로 향한다. 맥주가 항상 2개 이상 들어있었던 냉장고였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없다. 그제서야 내가 집에 맥주를 사들고 온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맥주는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집에 들어올때마다 편의점 봉투에 맥주를 한가득 사서 들어오곤 했다. 맥주가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할 그 텅 빈 공간을 보자 다시금 그녀가 그리워진다.


이미 솟아올라와 버린 알코올을 향한 열망은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어기적어기적 겉옷을 챙겨입고 현관을 연다. 찬바람이 불어닥쳐 몸이 으슬으슬 떨려온다. 겉옷을 꽁꽁 싸매고 편의점을 향해 걸어간다. 맥주 4캔을 사 주머니에 쑤셔넣고 집으로 돌아온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에 발을 딛자마자 한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같이 마실 사람이 없다.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다. 목구멍안에 무엇인가 울컥 하고 올라온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맥주가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데굴데굴 굴러간다. 그소리가 거슬린다.


손을 뻗어 맥주를 들어 캔을 딴다. 굴러가며 흔들린 탓인지 맥주가 넘쳐 내 손을 흠뻑 적신다. 닦을 생각도 나지 않아 가만히 그 광경을 쳐다본다. 터질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김빠진 맥주를 한모금 들이킨다. 이미 따버린 캔뚜껑은 다시 닫을 수 없다. 모조리 마셔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미 맥주 생각은 싹 달아나버렸지만 억지로 그 차가운 액체를 모조리 목구멍으로 넘겼다. 쓰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배는 쓰다. 그리고 많다. 아무리 마셔도 캔 속의 맥주는 줄어드는 기색조차 없다. 속이 더부룩해지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캔에서 입을 뗀다. 아직도 캔속에는 맥주가 절반이상 남아있다.


견디지 못하고 전화기를 꺼내 번호를 누른다. 화면을 안보고도 입력할 수 있는 번호. 단축키보다 내 손으로 치는게 빠른 번호. 우리집 도어락 비밀번호. 본능 수준에 각인되어버린 그 번호. 몇번의 신호음이 간다.


“여보세요?”


평소 그대로의 목소리.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흘러나오면 어쩌지, 그만 울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것은 모두 기우였다. 오히려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맥주 샀는데.”

“맥주?”

“혼자 마시기엔 좀 많아.”

“얼마나 샀는데?”

“4캔.”


전화기 넘어 그녀의 숨소리만 들려온다. 숨을 죽이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혹시라도 그녀의 말을 놓칠까봐, 그녀의 숨소리 하나하나가 내 호흡이라도 되는 것마냥 온 신경을 기울인다.


“냉장고에 넣어놔.”


그녀가 짧은 숨과 함께 토해낸 그 말은, 귀를 타고 들어와 뇌에 잠시 머물렀다가 심장에 콱하고 꽂혀 들어왔다.


“알았어.”


전화를 끊는다. 입꼬리가 씰룩 거리지만 동시에 후회가 밀려들어 온다. 죄책감과 기대감이 뒤섞여 뱃속에 끈적끈적 들러붙는다. 이러면 안되는 걸까. 한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마지막 한번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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