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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l 01. 2024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것은 '의식'이다.

영화 <컨택트, Arrival> 의 철학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2017년에 개봉한 이 영화의 원제는 'arrival' 입니다. 외계인 문명이 지구에 도착했다는 뜻이죠.  헵타포드라 불리는 거대한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은 오른쪽 그림에 보이는 반구형의 엄청나게 큰 바위덩어리를 타고 전 세계 곳곳에 소리소문없이 나타났습니다.  


또 왼쪽 사진의 먹물이 번진 것 같은 고리 모양들은 모두 외계인의 언어입니다. 이 고리 모양의 언어는 어느 한 지점에서 시작되지 않고 동시에 서서히 나타나 형태를 갖추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영어와 한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씁니다. 순서와 방향의 차이가 있어도 지구의 모든 언어는 시작점과 끝점이 있습니다. 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외계어는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시작과 끝이 없으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외계어는 모양만 표시합니다. 문어가 먹물을 뿜듯 검은 연기를 뿜으면 연기가 동그랗게 서서히 형상을 갖춥니다. -영화 보신 분은 알겠지만 무척 매혹적인 장면입니다.

  

시작과 끝이 없는 외계어는 그들에게 시간은 비선형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흐르지 않으며 모든 것은 동시에 지각됩니다. 그래서 외계인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고 우리 의식구조가 언어에 투영돼 있으니, 외계인은 그들의 언어처럼 비선형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경험하는 시간은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적입니다.


사실 비선형적 시간이니,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정지해 있기라도 한다는 말일까? 국방부 시계는 물에 담궈놓아도 돌아간다는 말처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간은 흘러가고 절대 멈출 수 없다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지구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시간이 카세트 테이프 같아서 되감으면 과거로 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실재하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철학계와 과학계 양방향에서 제기돼 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친구 미셸 베소가 사망했을 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죠.


"이제 그는 나보다 조금 먼저 이 세상에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물리학자들입니다. 시간의 구분인 과거, 현재, 미래는 단지 끈질긴 환상일 뿐입니다."


시간의 구분이 환상이라는 주장은 언제까지가 과거이고 언제부터가 미래인지를 묻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참입니다. 10분 전은 과거이고, 1분 전도 과거, 1초 전도 과거이겠지만 0.000001초 전은?


인간의 뇌는 감각정보를 통합해서 하나의 일관적인 경험으로 만드는데 심리학에서는 이 과정을 시간적 융합이라 부릅니다. 이 융합이 머릿속에 떠올라 머무는 시간은 대략 2~3초인데, 이 2~3초간을 우리는 '현재'로 인식합니다. 그러면 이 3초를 제외하고 그 이전은 과거, 이후는 미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관찰자의 속도나 중력에 따라 다르게 흐릅니다. 나에게는 3초가 다른 사람에게는 3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라.


심지어 루프양자중력이론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시공간은 개별 양자의 상태 변화에 의해 반짝반짝 나타나는데, 고전 물리학처럼 모든 사물의 배경에 흐르는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양자들의 동적 변수 사이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으악! 어려워) -틀릴 것을 각오하고 쉽게 풀이하면 양자중력이론에서는 양자가 없으면 시공간도 없습니다.   


한편 이 영화가 가장 어울리는 시간에 대한 가설은 블록 우주 이론입니다. 블록 우주 관점에서는 모든 사건이 하나의 시공간 내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이 동등하게 실재합니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시공간 내 특정 경로를 따라 이동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엔트로피의 증가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카를로 로벨리


카를로 로벨리는 루프양자중력을 연구하는 이론물리학자인데 그가 내놓은 가설은 블록 우주론과 유사하지만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시간이라는 형식을 만들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칸트도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틀이라고 말했습니다. 18세기 쾨니히스베르크의

 매일 똑같은 길을 산책했던 칸트의 이론이 21세기 노벨상 후보로 점쳐졌던 카를로 로벨리와 닮아있다는 것은 신기합니다.


아직도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도 남아 있습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에 따르면 언어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세계를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위 영화의 주인공 루이즈는 외계인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이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그녀의 전 생애를 관찰하게 됩니다. 환각이나 꿈처럼 말이죠.


불행히도 루이즈의 운명은 비극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이 희귀병으로 죽어가면서 자신을 낳은 그녀를 원망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게 되죠. 그리고 깨닫습니다. 함께 외계인을 연구하며 썸 타던 이안과 결혼하면 바로 그 딸을 낳게 될 것을 말이죠.  


자,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사람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는 희귀병으로 죽고 남편과도 헤어집니다. 심지어 아이는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를 낳았다고 엄마를 원망하죠.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불행이 예고돼 있다면 그 길을 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택이 가능하다면 말이죠. 아무리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랑이 불행이고 고통이라면 굳이 그 쓴 잔을 마셔야 할까요?


문제는 말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는 아이러니에 있습니다. 사랑이 주는 충족감은 그 어느 행복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그 아이와 함께 할 행복도 같이 포기해야 합니다.

당연하게도 행복만 가득한 미래는 거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행복이 얼굴만 바꾸면 불행이 됩니다. 불행이 두려워서 행복도 불행도 없이 밋밋하게 일생을 살아야 한다면 안 그래도 무의미한 인생이 더 허무하지 않을까요?


뭐 걱정할 건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미래를 보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교육문제다 뭐다 귀찮고 힘들 것은 뻔하지 않나요? 그 정도야 미래를 보는 능력이 없어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취직하면 스트레스가 심해질 것이고 여행을 가면 돈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는 취직을 하고 여행을 다닙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불행이 예고돼 있다면 그 길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한 걸음도 걷지 못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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