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사소한 킬러 1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제 이야기가 아니에요.
친구의 친구에게서 또는 지나가다 아는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이고 사실 확인도 해줄 수 없답니다.
영화나 드라마 첫 장면, 까만 화면에 무성의하게 쓰여있는 문구처럼, 이 얘기에 나오는 인명이나 지명, 상호, 기업, 고양이의 이름은 실제 사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채에 수십 억을 호가하는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 피트니스 클럽에서 시작됩니다.
피트니스 클럽의 이름은 ‘원투투’ 꼭 변두리 동네 치킨집 이름 같네요. 사장님 말로는 혼자 오지 말고 친구를 데려와서 같이 운동하라는 뜻, 혼자 보다는 둘이 낫다는 뜻이라는데 어떻게 그런 해석이?
원투투 피트니스는 겉보기에 시설 좋고 서비스 깔끔한 강남스타일의 헬스클럽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조안나가 일하는 곳이죠.
조안나는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으로 제법 잘 나가는 PT 트레이너입니다. 조안나는 남들이 모르는 또 하나의 숨겨진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해결사, 액수만 맞으면 살인 빼고는 뭐든지 해준다는 직업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해결사 이지 어쩌다 한 번 들어오는 의뢰만으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 생계유지 수단으로 피트니스클럽에서 PT 트레이너를 겸업하고 있습니다.
이날 조안나는 PT수업이 없어 낮시간 한가한 피트니스클럽에서 운동 중인 몇몇 회원을 관찰 중이었습니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운동하지? 근육을 붙이자는 거야 살을 빼자는 거야?’
‘저 어르신은 어디 아픈가? 왜 저렇게 헥헥 대? 저러다 숨 넘어가는 거 아니야?’
‘저 백수는 오전에도 오더니 오후에 또 왔네. 더블 개근상 노리나? 아주 뽕을 뽑아라!’
뭐, 그래도 조안나는 다 상관없었어요. 지들이 운동을 어떤 식으로 하든, 헉헉대다가 쓰러지든, 매일 오든 안 오든.
불만은 전혀 다른 데 있었죠.
바로 새로 취업한 원투투 피트니스의 회원들은 PT를 별로 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 많다면서 왜 PT를 안 해? 돈 많으면 자동으로 운동도 잘하는 줄 아나?’
사실 우월한 몸매에 탄탄한 근육, 서구형 이목구비를 겸비한 조안나에게는 성공률 99%의 필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업용 개인운동이죠.
PT트레이너가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몸을 PT강사에 알맞게 가꾸는 일이죠. 강사가 너덜너덜하면 누가 PT 받겠어요?
또 하나는 홍보입니다.
'내 몸매 이 정도야! 언니랑 같이 운동 안 할래?'
개인운동을 하며 온몸으로 매력을 어필하면 그 모습에 매료된 회원들이 저절로 다가오는 영업방식이죠.
그럼 조안나가 PT회원을 유혹하기 위한 운동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 손등이 앞을 향하게 덤벨을 잡고 양발을 골반 너비로 벌립니다. 골반이 중요해요~
2.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상체를 앞으로 충분히 숙인다. 앞에서 가슴골이 보이게~
3. 거기에 힘을 줘 엉덩이가 빵빵하게 부풀게 한다.
아, 복장을 빼먹었네요.
하체는 그녀의 살색과 비슷한 살구색 레깅스, 상체는 복근이 훤히 노출되는 검정 크롭탑!
그렇게 입고, 거울을 마주 보는 상태에서 복부에 힘을 주고 덤벨을 끌어올리면 크롭탑으로 조여진 가슴골이 자연스럽게 거울에 노출되며 섹시미가 빵 터집니다.
당연히 남자회원들이 관심을 보이겠죠? 그런 회원들을 딱 찍어놨다가 운동할 때 접근합니다.
“어머! 다 잘하시는데 저한테 PT 살짝만 받으시면 몸 진짜 좋아지겠다.”
마치 PT만 받으면 그녀와의 친밀도도 급상승할 것 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깁니다. 게임 끝이죠.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어요. 이번에 새로 옮긴 원투투에서는 PT회원 수가 예전의 절반 가까이로 줄어든 거예요. 동네라면 이곳이 훨씬 부자동네이고, 시설도 훨씬 좋은데 왜 PT를 안 받는 걸까요?
이유는 가까운 데 있었습니다. 원투투의 주 고객층이 젊은 남자 직장인이 아니라 은퇴한 부자 어르신이거나, 고액연봉 의사 변호사의 사모님들이었던 거죠. 차라리 사모님이 아니라 의사 변호사 본인이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말이죠.
PT수업이 적으니 멍 때리는 시간만 늘어나고, 매트 위에서 폼롤러 베고 잠자는 얼간이나, 파워렉이 등산길 소나무나 되는 것처럼 등치기나 하고 있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짜증을 증폭시키고 있었죠.
그러던 중, 30대 중반의 남성회원이 소심하게 조안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조안나는 직감했죠.
‘올 것이 왔다. 드디어 입질이 오는구나.’
조안나는 눈을 반짝이며 새 PT회원을 받기 위해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잡았습니다.
이 남자의 이름은 김동훈, 우리 이야기의 두 번째 주인공입니다.
“저기..”
“네, 뭘 도와드릴까요?”
조안나는 생긋 웃었습니다. 그녀의 미소에 넘어오지 않을 남자는 거의 없었으니까요.
예전에 한 번은 잃어버린 운동화 찾으러 왔다가도 조안나의 눈웃음에 홀려 PT를 예약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기 원래 이렇게 덥나요?”
“덥다고요? 어디가요?”
“여기 전부 다요. 에어컨 좀 켜 주시면 안 돼요?”
사실 조안나는 거의 앉아만 있어 덥지 않았어요. 반면 김동훈 씨는 운동용 땀복까지 껴입고 있었죠.
“네. 알아볼게요. 회원님.”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으며 조안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혹시 다음에라도 PT를 할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이 남자, 알아보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10분을 못 참고 또 와서 어필했습니다. 물론 조안나도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알아볼 생각도 없었죠.
“저기.. 에어컨 아직인가요?”
김동훈 씨도 제 딴에는 참고 있었더랍니다. 무료 구민회관도 아니고 강남의 피트니스 클럽이 덥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조안나는 제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스마트폰만 만지고 있으니 화가 날 밖에요.
조안나는 바로 그 시각, 스마트폰으로 신규 은행계좌를 만들고 있었어요.
신규 계좌를 만들면 스타뽁스 무료음료 2잔을 준다는 이벤트에 응모하고 있었던 거죠. 돈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계좌 하나 만드는데 절차는 뭐 이리 복잡한지, 신분증 촬영을 하라고 해서 투덜거리며 폰으로 주민증을 찍고 있었더랍니다.
“저기요.” ← 더럽게 눈치 없는 김동훈 씨
찰칵, 마침 버튼을 누를 때 김동훈 씨가 얼굴을 들이밀어 신분증에 그림자가 생겼고 ‘신분증 확인불가'라는 에러 메시지가 떴습니다.
“아오. 씨~” ← 짜증 난 조안나
“네? 뭐라고요?” ← 황당한 김동훈 씨
“거기 조금 비켜봐요.” ← 더 짜증 난 조안나
“네?” ← 더 황당한 김동훈 씨
김동훈 씨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사태파악을 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태도로 보아 절대 에어컨을 강하게 틀어 주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죠.
뭔가 엄중하면서도 예의에 벗어나지 않고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경고를 해야 하는데, 용어선택도 하기 전에 조안나가 먼저 말했습니다.
“좀 비켜보라니까욧! 그쪽 때문에 잘 안 찍어지잖아요?”
마음 급한 조안나가 거듭 사진을 찍고 대충 아무거나 눌러대자 이벤트 응모는커녕 모든 절차가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무려 15분 동안 스마트폰을 들고 씨름했는데 무료 음료권 획득에 실패한 겁니다. 열받았죠. 성질도 급한데.
그러나 김동훈 씨는 김동훈 씨 대로 불쾌감이 절정에 올랐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김동훈 씨는 이 한마디에 조안나가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실수한 거죠. 상대를 완전히 잘못 파악했어요. 조안나가 대놓고 짜증을 폭발시켰습니다.
“에이, 다 망했네. 이거 어쩔 거야?”
그리고 조안나와 김동훈 씨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서야 둘 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았죠.
“회원님, 잠시 저 좀 따로 보실까요?”
조안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피트니스클럽 밖으로 따라 나오라 손짓했습니다. 김동훈 씨는 황당이 당황으로 바뀌기 시작했죠.
'따라 나오라니. 왜? 따라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그의 직감을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동훈 씨는 오랜 세월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온순한 남자.
그의 사전에 ‘NO’라는 거절은 없었던 것이죠. 나오라면 나갑니다.
조안나는 화장실 앞까지 김동훈 씨를 데려갔습니다. 흔히 학창 시절에 불량 청소녀들이 그러했듯이.
“이봐요, 회원님. 그쪽 눈에는 내가 건물관리인으로 보여요?”
“네?”
“뭐가 자꾸 ‘네?’ 에요? 한국말 못 알아 들어요? 저는요, 트레이너지 건물관리인이 아니에요.
이 건물은 중앙냉방시스템으로 돌아가는데 그쪽이 에어컨 더 틀어 달라고 하면 내가 뭘 어쩌라고? 게다가 그렇게 더우면 그 입고 있는 땀복을 벗으면 되지 않을까요?
두꺼운 옷을 처 껴입고 있으니까 더운 거 아니에요?"
“그래도.. 무슨 말을 그렇게..”
“잠깐만요. 내 말 안 끝났어요. 회원님, PT 안 받죠?”
조안나의 본심 나왔습니다. PT만 받았어도 이 사단이 안 났겠죠.
“PT요? 안 받는데요?”
“회원가입은 1+1 이벤트 할 때 한 거죠?”
“네.”
“그럼 월회비 10만 원인데 1+1 이니까 한 달에 5만 원만 내고 강남 헬스클럽에 다니는 거네요. 헬스 옷도 가져와서 입고 라커도 안 쓰고. 추가비용 1도 없이 다니면서 불만은 제일 많은 거 알죠?”
김동훈 씨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고 있던 땀복을 벗었습니다. 아니면 맞을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조용히 헬스장으로 돌아갔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조안나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오늘도 PT회원을 한 명도 추가하지 못한 거죠. 웬 진상 회원 덕에 무료음료 쿠폰도 못 받고.
여기서 우리의 진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바로 박서우, 조안나가 더부살이하고 있는 오피스텔의 주인이자 절친입니다.
그녀는 막 경찰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