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사소한 킬러 3화
박서우는 조안나의 절친이자 룸메이트입니다.
그녀에 대해 확실한 것 하나, 머리가 비상하다. 둘, 몸 쓰는 걸 싫어한다.
불확실한 거 하나, 엄마가 누구지? 불확실한 것 둘, 얘 정상 맞아?
그리고 이상한 거 하나, 직업이 경찰입니다. 경대 나온 경찰.
박서우는 워낙 실외 활동을 싫어하다 보니 몇 년째 내근직만 돌고 있는데 지금은 교통과 민원실에서 근무 중입니다.
“이거 때문에 왔는데 왜 나보고 경찰서에 오라는 거에요?”
민원인 남자는 억울한 표정으로 박서우 앞에 서서 우편물 한장을 내밀었어요. 우편물은 ‘교통법규위반 사실확인요청서' 였습니다.
“적힌 대로입니다. 교통법규를 위반하셨으니 여기 와서 사실을 확인하라는 겁니다.”
“내가 뭘 위반했는데요?”
“방향전환 진로변경시 신호불이행이라고 적혀있네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구요?”
“차선 바꿀 때 방향지시등, 즉 깜빡이 안 넣었다는 뜻입니다. 영상 확인하시겠어요?”
“깜빡이요? 내가 그걸 안 켰는지 어떻게 알아요?”
“뒤에 차주분이 블랙박스 영상으로 공익신고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신고를 해요? 신고하면 상금 줘요?”
“상금은 없구요, 공익을 위해서 신고한 겁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돈도 안 주는데 귀찮게 이 따위 신고를 해서 바쁜 사람을 경찰서에 오라가라 하냐구요? 누구에요? 신고한 사람 이름 있죠?”
“신고자 개인정보는 알려줄 수 없구요, 과태료 고지서 나갈 테니까 납부하시면 됩니다.”
“내가 그걸 왜 내요? 뭘 잘못했다고? 깜빡이 안 켜는 게 나 혼자인가? 그럼 다 잡아오든가. 그냥 봐주면 안 되요?”
“안됩니다. 공익신고가 들어오면 규정에 따라 처리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규정만 따를 거면 이런 걸 왜 사람이 해? 그냥 기계가 하면 되지. 여기 책임자 누구야? 나오라고 해!”
민원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교통과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로 박서우는 주목 받는 것을 무척 싫어하죠.
“이쪽으로 따라오시겠습니까?”
박서우는 민원인을 데리고 교통과 민원실을 나와 조금 한적한 복도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도 잘 들리게 남자의 귀에 속삭였죠.
“잘 들어. 첫째, 하루에 내가 처리하는 공익신고만 평균 23건이야. 당신은 나한테 소리 한번 지르고 가면 되지만 난 너 같은 인간을 하루에도 스무 번 이상 만나야 한다고. 둘째, 이 귀찮은 공익신고를 할 정도면 걔들 성격이 어떨 것 같니? 자기가 신고한 거 어떻게 처리됐냐고 일일이 문의하고 마음에 안 들면 경찰서 민원실에 또 민원 넣거든. 참고로 어떤 인간은 혼자서 1년에 5천 건 이상 공익신고 하더라. 어떤 인간인가 궁금하지? 나도 궁금해. 셋째, 남들도 깜빡이 안 넣는데 왜 너만 그러냐고? 그러면 이 세상 살인범 전부 못 잡으면 한명도 잡으면 안 되겠네?”
민원인 남자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을 것 같은 박서우가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읊어 대는데 주먹으로 치는 것 말고는 반박할 방법이 없었죠. 하지만 경찰서 내에서 경찰을 때릴 수는 없는 일, 죽일 듯 노려보다 돌아갈 밖에요.
박서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퇴근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일상다반사라는 거죠. 집에서는 조안나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 돈 좀 빌려줘.”
박서우는 조안나를 보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조안나에게 ‘어서와. 오늘 하루 어땠어?’ 같은 정상적인 인사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저번에 줬잖아.”
“다 썼어.”
조안나는 언제나 당당합니다. 박서우는 거실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고있는 조안나의 ♥넬 크로스백을 가리켰습니다.
“저거야? 내가 빌려 준 돈?”
“응.”
“그럼 빌린 돈을 먼저 갚는 게 순서 아닐까?”
“갚지. 당연히 갚지. 그치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사정이 그렇잖아. PT도 못받고 진상회원들 뒤처리만 하는 거.”
“언제 갚을 건데?”
“다음 달에 월급 받으면? 에이, 재벌가 외동딸이 그깟 돈 가지고 왜 그래? 오늘 너 되게 까칠한 거 알아?”
“내가 몇 번을 말해? 내 위에 오빠라는 인간이 셋이나 있어. 외동딸이라는 말은 아무도 없고 나만 있을 때 하는 말이지.”
“그래도 아빠가 재벌인데..”
“그 아빠가 날 딸로 인정하지 않는데, 너 혼외자라는 말은 아니?”
“너네 집안 복잡한 사정이야 잘 알지. 그래도 돈 많은 건 사실이잖아.”
“돈 많으면 내가 왜 이러고 살까? 쥐꼬리만한 봉급에 매너없는 인간들이나 상대하는 경찰공무원으로..”
“그야... 언더커버?”
박서우는 더이상 조안나와 말하는 게 아무 쓰잘데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번 그렇지만. 둘은 왜 같이 사는 걸까요? 비슷한 점이라고는 하나 없는데.
“나 씻는다. 그리고 저녁은 알아서 먹어. 난 생각 없어.”
“나도 같이 씻어! 피곤해 보이는데 이 언니가 맛사지 좀 해 줄까?”
박서우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조안나를 돌아봤습니다. 조안나는 방실방실, 어떻게든 돈을 얻어내겠다는 각오로 비굴함이 삐질삐질.
“넌 자존심도 없니? 내가 이렇게 하는데도.”
“없어! 내가 샤워기 물 틀어 놓을 게. 갑자기 찬물 나오면 너 싫어하잖아.”
조안나는 이미 훌러덩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서둘러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박서우가 피식 웃네요.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러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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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캘러한은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었습니다.
“캘러한, 혹시 그 노트북 내 거 아닌가?”
“맞는데. 지금 쓰려고? 잠시만. 거의 끝났어.”
김동훈씨는 캘러한의 뻔뻔함에 어이없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 아니어서 화내지 않고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지금 그걸로 뭐 하는 거야? 설마 그.. 킬러 의뢰를 받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냥 의뢰인 상담 중. 여기 오피스텔 이름이 뭐였지?”
“홈시티 오피스텔, 잠깐, 지금 여기로 오라고 하려고?”
“당연하지. 인터넷으로 어떻게 돈을 받아?”
“안돼! 여기는 절대 안돼!”
“에이, 동치과, 또 그런다. 동업자끼리 왜 그래?”
“내가 언제 동업한다고 했어? 난 살인 같은 거에 관여할 생각 조금도 없으니까 그럴 거면 나가! 방 빼라고.”
김동훈씨는 나름 결연하게 말했다고 생각하고 뿌듯했습니다. 이제껏 지켜봤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캘러한은 화를 내거나 할 스타일은 아니었거든요.
“알았어. 죽이는 것만 아니면 되는 거지? 어차피 이번 의뢰는 그런 거 아니니까 괜찮은 거고. 오케이. 30분이면 올 수 있대.”
“의뢰내용이 뭔데? 정확하게 말해봐. 한 자도 빼지 말고.”
“뭐 공익신고인가 뭔가 있다며?”
“공익신고? 내부자 고발 말이야?”
“아니 그런 거창한 거 말고, 교통위반 했을 때 일반 시민이 찍어서 경찰서에 신고하는 거.”
“교통 파파라치? 요즘 없어졌는데? 신고해도 돈 안 준다고 해서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돈 안주는데도 그걸 열심히 하는 인간들이 있다네. 하여튼 이 나라도 참 이상한 나라야. 사람들도 이상하고.”
“그런데 그게 의뢰하고 무슨 상관인데?”
“의뢰인이 자기가 깜빡이를 안 넣고 차선을 바꿨는데 그걸 블랙박스로 찍어서 경찰에 신고한 인간을 찾아달래.”
“찾아서 뭐하게?”
“그야 모르지.”
캘러한은 당연히 모르는 걸 왜 묻냐는 표정을 지었죠. 김동훈씨는 특유의 착한 사마리안 기질이 발동.
“그랬다가 그 의뢰인이 자기 신고한 사람 찾아서 복수하면 어떻게 하는데?”
“의뢰인이 뭘 하건 난 상관할 바 아니지. 난 찾는 거까지만 의뢰받았으니까.”
“만약에 의뢰인이 찾아서 때려달라고 하면.”
“그건 안되지.”
김동훈씨는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생각했던 대로 캘러한이 그런 무뢰배까지는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킬러라는 말도 그냥 하는 소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런 의뢰는 받지 않는 게 어때? 당신은 킬러지, 그런 시시한 일이나 하는 심부름 센터는 아니잖아.”
“그게 아니라 때릴 거면 돈을 더 받아야지. 사람은 응당 제 가치가 있는데 돈도 안 받고 사람을 쳐? 안되지.”
김동훈씨는 캘러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캘러한은 돈만 주면 뭐든 하는 해결사이면서 동시에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그런 류의 인간이었던 거죠.
하지만 캘러한은 그 공익신고자를 어떻게 찾으려는 것일까요? 궁금.
“그렇다치고, 그런데 공익 신고한 사람은 어떻게 찾을 건데?”
“그거야 간단하지. 의뢰인한테 차에 블랙박스가 카메라가 후방에도 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가져오라고 했지.”
“그걸로 어떻게 찾는데?”
“뭘 어렵게 생각해? 의뢰인이 차선 위반하는 순간 뒤에 있던 차의 넘버를 따면 되지.”
“차 넘버를 알면?”
“그 다음은 다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지. 나는 뭐 정보원 한명 없이 이 바닥에서 일하는 줄 알아?”
김동훈씨는 드디어 캘러한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놔뒀다가는 국익을 위해 공익신고를 한 멀쩡한 시민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도요.
“안돼! 난 반대야. 내가 동업자라고 했지? 동업자로서 이번 의뢰는 킬이야. 받지 말라고.”
“30만원 짜리인데? 그거 받아서 이번 달 집세 내려고 했는데?”
“그 돈 내가 안 받으면 되지? 그럼 된 거지? 끝. 의뢰인한테 연락해서 오지 말라고 해!”
“그것도 괜찮네. 그럼 그렇게 할까?”
캘러한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습니다. 김동훈씨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구요. 자기 월세가 날아가는 것도 모르고.
“어? 벌써 다 왔다는데? 오피스텔 밑이라고. 몇 호냐고 묻는데 어쩌지? 내려가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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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나는 약속대로 목욕 후 박서우의 등을 마사지하고 있었습니다. 국가대표 시절 연습 후 대표팀 선수들끼리 서로 근육마사지를 해줬던 경험이 있어 조안나의 마사지 실력은 일류급입니다.
엄지와 다른 손가락을 이용해 상반신을 완전 탈의하고 엎드려 누운 박서우의 판상근(목 옆)과 목 뒷덜미를 천천히 주무르다 승모근과 견갑근의 가장 자리와 다른 근육이 겹치는 부분을 엄지로 꾹꾹! 살폿이 꾹꾹!
박서우는 낮은 신음 소리를 흘려 냈습니다.
“아~~”
“야한 소리 내지마. 처음도 아니면서.”
“내가 언제 야한 소리를 냈다고..”
“넌 체구도 조그만 게 뭐 이렇게 뭉친 데가 많아? 경찰서 일이 그렇게 힘든가? 교통 딱지나 처리하는 사무직이라며?”
“진상이 많아서 그래. 오늘은 스물 살 조금 넘은 인간 남자가 깜빡이 안 넣고 운전한 주제에 신고한 사람 이름 알려달라고 난리를 치더라.”
“어떤 미친 인간이 그래? 그런 놈들은 그냥 바로 반달차기로 안면을 찍어서 코를 빈대떡으로 만들어놔야 하는 건데.. 빈대떡 얘기하니까 배고프다. 자매님, 마사지 끝내고 저녁 식사는 어디로 모실까요?”
이리하여 조안나와 박서우도 오피스텔 로비로 내려갔더랍니다. 그리고 캘러한에게 의뢰하려고 온 그 진상 노깜빡이 운전자를 딱 마주쳤구요.
“어? 너는.. 경찰서에서 그 재수없는 여자 경찰 맞지?”
박서우는 처음에 그놈을 못 알아봤습니다.
쓸모 없는 인간들까지 모두 기억하기에 그녀의 인생은 무척 복잡한 것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