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가 치한 공화국이야?

유쾌한 City Life : 男2 女2 시트콤

by 시sy

사소한 킬러 16화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기네요.

캘러한은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경찰을 피했던 것일까요?

비겁해서?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아니면 그냥 경찰이 무서워서?

창틀에 매달리면 죽을 수도 있는데, 죽는 건 안 두려우면서 경찰은 두렵다?

넘어가고요.


그렇게 김동훈 씨가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캘러한은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했을까요?

아니에요. 캘러한은 라면을 끓여 먹었어요. 난리통에 저녁을 안 먹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죠. 그리고 또 생각했어요.

그 쪼잔한 인간(김동훈 씨)이 아무 말 안 할리는 없고 경찰에게 술술 다 불었을 텐데.. 경찰이 그를 잡으러 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이죠.

‘도망갈 시간을 벌려면 라면을 빨리 먹어야 해!’

캘러한은 속도를 높여서 라면을 흡입하고 오피스텔문을 나섰어요.

‘그런데 어디로 가지? PC방? 찜질방?’

문제는 그가 어디로 갈지, 갈 만한 곳 대부분을 김동훈 씨도 알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역시 동 치과는 너무 많이 알아. 위험해. 그냥 죽일까?’

하지만 김동훈 씨는 아직 이용가치가 많이 남아있었죠.

‘아니야, 동 치과만큼 어리바리한 인간을 또 찾기는 힘들어. 빌붙기도 퍼펙트하고. 쩝. 할 수 없지. 살려는 주자.’

어리바리한 덕에 김동훈 씨는 자기도 모르게 목숨의 위기를 또 한 번 넘겼습니다.



캘러한은 박서우에게 전화했어요.

:: 생각보다 훨씬 빠른데요! 나랑 사귀기로 결정했나요?

“몰라, 그딴 건 알아서 하고 나한테 빚이나 갚아!”

:: 어머, 사귀는 걸 어떻게 혼자 알아서 해요? 같이 해야지.

“뭘 같이 하자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하는 걸로 해. 그러니까 급한 일 하나만 처리해 줘.”

:: 시원시원해서 좋긴 한데. 알았어요. 뭐 하면 되죠?


김동훈 씨도 아직 배가 고팠습니다. 누구와 달리 훨씬 더 본연의 의미에서요.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배달음식도 못 시키고, 변호사는 부를 꿈도 꾸지 못하고, 도와줄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순경에게 맡겨 놓은 스마트폰이 충전되기만 기다리고 있었죠.

“저기요, 내 폰 좀 주면 안 돼요?”

겨우 사정사정해서 휴대폰 충전을 맡기기는 했는데, 다들 어디로 갔는지 김동훈 씨의 이 작은 부탁 하나 들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눈물이 나옵니다. 치과군의관을 하면서 쓰리스타 장군이 쓰려고 맞춰 놓은 순금 크라운이 없어져서 석 달 치 월급을 차압당했을 때 이후에 처음 흘려보는 눈물이었죠. 군대에 어떤 도둑놈이 들어와 금이빨을 훔쳐 간답니까?


“울어요?”

많이 들어본 목소리, 박서우였습니다.

김동훈 씨에게는 구세주가 나타난 겁니다.

김동훈 씨는 여자에게 못 보일 것을 보였다는 생각에 눈물을 감췄지만, 사고무친 한 경찰서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 보니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와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어요.

“여긴 어떻게 알고.. 흑흑.”

“그만 우시고, 무슨 일이에요?”

“그게 말이죠. 캘러한이.. 흑흑..”

캘러한은 박서우에게 김동훈 씨가 경찰서에서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요청했을 뿐,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았던 거죠.


그리하여 김동훈 씨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박서우는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어요. 두루마리 휴지 때문에 잡혀왔다는...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나오는 걸 어째요?

“조금만 있어 봐요.”

박서우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고 김동훈 씨는 울다 만 얼굴로 애달프게 충전 중인 휴대폰을 쳐다봤어요.

“저기, 내 휴대폰은.. 좀 주고 가지..”

30분 정도 지난 후 박서우는 다른 경찰과 함께 다시 나타났어요. 경찰은 말없이 유치장 문을 열었고 김동훈 씨에게 나오라고 손짓했죠.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가셔도 됩니다."

김동훈 씨 어리둥절,

“어떻게…?”

박서우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일단은 나와도 돼요. 고소인이 사과를 요구하고 있기는 한데, 김동훈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까요. 약식 기소될 수도 있지만 구속사유는 아니고. 아까 경찰서에서 소동 피운 거는 내가 말해서 없던 것으로 하기로 했고요.”

어쨌거나 김동훈 씨는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고위(?) 경찰간부의 위엄이라고 할까요?


박서우와 함께 경찰서를 나오던 김동훈 씨는 캘러한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어요. 킬러든 뭐든 눈에 띄기만 하면 곧바로 코를 물어뜯어 죽일 기세였죠.

이쯤 되면 미안해서라도, 인간이라면, 김동훈 씨를 마중 나올 만도 한데 캘러한은 코빼기도 안 보였어요. 대신 안 와도 괜찮을 사람이 둘이나 와 있었습니다.

“치과오빠 괜찮아?”

조안나와,

“동훈 씨 두부 먹어요!”

썸을 건너뛰고 곧장 사귀기 시작한 전유나였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뜯지도 않은 풀미원두부가 들려있었어요.

“여길 왜…? 어떻게 알고...?”

“캘러한 그 미친 작자가 치과오빠를 경찰에 팔아넘겼다며?”

조안나가 대신 흥분했습니다. 중간과정 다 건너뛴 요약판이지만 결과적으로 맞습니다. 왠지 위로도 됩니다.

“같이 마트를 털었다면서 어쩌다 동훈 씨만 잡혔어요. 캘러한은 어디 가구요? 혼자 도망쳤어요? 비겁한 사람이네요. 그렇게 안 봤는데.”

이 버전은 완전히 잘못됐습니다. 차라리 마트라도 털었더라면 이리 쪽팔리진 않았겠죠.

겨우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와서, 그걸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범이라며. ㅠㅠ

김동훈 씨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는데 전유나는 굳이 비닐 포장을 뜯어 생두부를 김동훈 씨 입에 집어넣었어요. 말도 못 하게.

“한국에서는 감옥 다녀오면 두부 먹어야 한다고 하던데 어서 많이 먹어요. 어쩌다 우리 소상한 동훈 씨가 강도질에 끼어서. 이게 다 캘러한 때문 맞죠?”

-'소심한'이겠지. 그리고 한국에서는? 당신은 한국사람 아니야? 강도질?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전유나가 자꾸 두부를 먹이는 통에 김동훈 씨는 어버버, 입주위 두부를 가득 묻히고 토해냈어요

“으, 퉤퉤. 왜 자꾸 두부를.. 그만! 그만!”

게다가 전유나를 손으로 밀쳐 버렸죠. 양손으로 두부 먹이기에 정신이 팔렸던 전유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습니다.

“앗!”

“어머!”

이제 사태 수습은 글렀습니다.

전유나는 울고 불고 난리가 났고, 김동훈 씨는 울고 싶은 사람은 본인인데 전유나를 달래기 급급했죠.

조안나는 황당하고 박서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느라 입을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 시간 캘러한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복수 의뢰받았던 치한 겸 스토커를 쫓고 있었습니다. 마음 복잡할 때는 일하는 게 최고죠.

의뢰인의 여동생이 치한에 쫓기다 사고를 당한 으슥한 골목길을 수시로 드나들며 비슷한 놈이 나타날 때마다 때려잡았는데, 그게 벌써 17명 째였죠.

잡고, 패고, 사진 찍고, 내다 버리고. (반복✕4)

오늘따라 일에 열심입니다.

“뭐야? 또 아니야? 이 동네에는 뭔 놈의 치한이 이리 많아? 치한 공화국이야?”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마음도 뒤숭숭합니다.

-동 치과는 집에 갔겠자? 많이 삐졌을 테니 오늘도 집에서 자긴 글렀군. 그냥 내일 아침 유치장에서 빼내 주라 할 걸 그랬나?


또 한 명 옵니다. 조안나와 같이 함정 팔 때는 잘 안 보이던 치한 비슷한 인간들이 유독 많이 보였죠.

어쩌면 치한 아니고 그냥 취객일 수도 있었지만 캘러한은 상관 안 했습니다.

혹시 압니까? 오늘은 치한이 술을 먹고 왔을지..

“또 아니네.”

당연히 아니죠. 이번에는 치한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그냥 앞에 가는 여자와 동선이 같을 뿐이었죠. 조금만 주의 깊게 봤으면 당연히 알았을 텐데 그걸 안 했어요. 귀찮아서요.

다 계절 때문입니다. 가을이 죄인 거죠.

그치만 가을을 잡아 팰 수 없으니 별 상관없는 인간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캘러한은 다짐했습니다. 이제 딱 세 명만 더 때려잡고 그래도 아니면, 아예 의뢰를 그만두기로.

아무리 범인은 범행장소에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고 하지만, 24시간 지키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캘러한이 놓쳤을 수 있습니다.

CCTV 없고, 목격자 없고, 있는 거라고는 해상도 떨어지는 사진 한 장, 애초에 그 치한인지 뭔지가 의뢰인의 여동생을 죽게 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캘러한이 다짐하고 타깃을 기다리는 중,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인간이 적당한 거리로 젊은 여자를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어디부터 따라온 거지? 에라이 모르겠다! 퍽!

사진 찍고 전송, 답신을 기다리는데 난데없이 의뢰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여동생을 스토킹 하던 치한이 맞다는 거예요! 진짜?

“그럼 이제 처리하면 되는 거지? 잔금 현금으로 준비해.”

캘러한은 고민했습니다. 깨워서 물어봐야 하나? 그랬다가 캘러한의 얼굴을 보게 되면 영원히 입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묻지도 않고 없애버리자니 좀 찜찜하고. 이게 다 조안나 때문입니다.

‘조안나 그것이 괜한 소리를 해 놔서..‘


마침 스토킹 살인마 용의자가 부스스 깨어났습니다.

-뭐 벌써 일어나? 너무 약하게 들어갔나?

역시 서둘러 라면만 먹고 나온 게 문제였습니다. 밀가루는 근기가 없으니까요.

“돌아보지 마! 내 얼굴 보면 죽는다!”

위협적인 목소리에 겁나서 못 돌아봅니다.

“누구신데 도대체 왜…?”

“묻지 말고, 내가 묻는 말만 딱 대답해. 이 여자 알아?”

피해 여성의 사진을 눈앞에 내밀었습니다.

“아, 저.. 모르는 여자인데요.”

“그럴 줄 알았어.”

안심한 듯,

“그럼 전 살려주는 겁니까?”

“아니. 생각해 보니까 네가 맞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네.”

“네?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의뢰인이 맞다고 한 게 중요하지.”

“의뢰인요? 의뢰인이 누구인데요?”

“곧 죽을 텐데 알아서 뭐 하게? 아니 죽을 거니까 알아도 되나?”

전에도 말했지만 캘러한은 농담도 진담 같이 하고, 진담은 더 진담처럼 들리는 특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뒷덜미를 얻어맞고 깨어나 보니 커다란 남자가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데, 같은 범죄인끼리라서 그런지, 죽인다는 말이 단순 협박이나 빈말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캘러한은 호리호리하지만 백 조명 받고 실루엣으로 보면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저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

“제가 죽인 게 아니에요. 그 여자 혼자서 도망가다가.”

“오케이, 자백 나왔고, 그럼 끝내자.”

“뭘 끝내요?”

“니 목숨.”

“내 목숨을 왜 끝내요? 제가 죽인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알아. 상관없다고.”

“그게 왜 상관없어요?”

“그게 왜 상관있어?”

“네?”

스토커 용의자는, 아니 자백했으니 이제 용의자가 아니네요. 스토커 확정은 급한 마음에 머리를 돌려 캘러한의 얼굴을 보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 방금 내 얼굴 봤지?”

“안 봤는데요.”

스토커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 소용없었죠.

얼굴을 보인 게 확실하자 캘러한은 마음먹었습니다. 이제 적당히 망가트리고 끝내는 옵션은 사라졌거든요.

“이제 내 얼굴 봐도 상관없어. 어차피 죽는데. 실컷 봐.”

“못 봤어요. 봤어도 못 본 척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괜찮아. 죽는 거 금방이야. 사는 게 힘들지, 죽는 건 한 순간이니까.”


자기가 죽을 것도 아니면서 ‘괜찮다. 금방이다’는 말이 위로가 될까요?

하긴 캘러한은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었죠.

캘러한에게 남은 고민은 죽이고 옮기느냐, 옮기고 죽이느냐였는데 그 고민도 금세 끝났어요.

그리고 그는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해치웠죠.

이번에는 꽤 오래간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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