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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Sep 13. 2016

E

그쯤에서 해

남자의 고백은 언제나 자기 해소에 목적이 있다. 나에게 토로하는 이야기이지만 나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랑의 고백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북받쳐 오른 감정일 뿐 그 말 안에 내 입장이나 감정은 고려된 적이 없었다.


“내 여자가 되어줘.”

그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일까? 그런 소유격이 내게 낭만적으로 작동할 거라고 믿었다는 게 안쓰러웠다. 그건 되는 게 아니라 서로 간의 신의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서로가 느끼는 ‘상태’였다. 내 여자가 되라니. 우스운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의 축적 끝에 누군가가 내 남자라고 느껴질 때조차도 함부로 내뱉기 어려운 말이었다.


어떤 무리에서든 한 명. 몸을 섞을 정도로 엮일 남자는 딱 한 명인 것이 현명한 태도겠지만 남자의 어리석음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고 그 화가 멍청한 짓을 부추긴 건 사실이었다.


남자는 아직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끊임없이 자기감정을 설명하려고 들었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네가 애쓴다고 해도 우리 둘 사이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응, 지금 네 오른쪽 옆에 앉아있는 남자,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 남자. 둘 다 내 몸 안에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쏟아내고 잠들어버렸지. 왼쪽 옆 옆에 앉아있는 해사한 얼굴을 가진 남자말야. 그 녀석은 술기운이었겠지만 골목길을 같이 걷다 으슥한 틈새로 나를 밀어 넣더니 성급한 마음을 잘 자제한 키스를 하더라. 그런 키스를 하는 남자라면 끝까지 가더라도 실망할 일이 적지. 그래서 그의 방으로 갔어. 키스만큼 능숙하고 여자를 잘 아는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건 욕실 선반에 놓인 제품들을 보면서였어. 정말 하나같이 남자용 밖에 없더라구.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상태여서 불편했고 불편했지만 그걸 감수할만한 섹스는 할 수 있었어. 옆집에서 불만을 표시하며 벽을 쾅쾅 칠 정도로 말야.


사적 경험을 남자새끼들끼리 비겁하게 공유했는지 셋과 자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돌변해서는 나를 비난하려고 하더라. 좋아하는 여자, 갖고 싶은 여자에서 한순간에 남자를 쉽게 취하고 타인의 감정 따위는 쉽게 무시하는 냉정한 여자로 만들고 싶어 했지.


네가 나에게 그런 비난을 한 게 부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야. 네가 한 말이 모두 틀린 건 아니니까. 나는 나를 싫어하면서도 그런 나 자신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데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몰랐다는 듯 새삼스럽게 날 힐난하려 하는 태도가 어이없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마음으로 그 정도는 감수하고 덤볐어야 하는 거 아냐? 도대체 어떤 나를 보고 있었던 거야?


자존심에 상처 입은 남자는 위험하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거리를 둔 건 그런 이유였어. 냉각이 필요한 건 너였으니까. 지금 대체 몇 명의 남자를 만나고 있는 거냐고? 너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많아? 그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 너는 네가 몰라도 되는 것과 너랑은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만 물어봤지. 정작 네가 알아야 하는 것은 전혀 모른 채 말야. 너도 그저 그 남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잖아. 한 번 공들이고 나면 그 뒤로 수월하게 밤을 보낼 수 있는 여자가 나일 거라고 생각한 거잖아.


내게 고백하면서 장미 꽃다발과 반지가 담긴 민트색 상자를 건넸지만, 내가 혹할 만 한 건 하나도 없었어. 그 중에 글씨도 알아보기 힘든 손 편지는 최악이었지. 사랑의 세레나데라도 부르겠다고 덤비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어쩜 그렇게 창의성이 없니? 너무 뻔한데 부담스럽기만 한, 고백의 정석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날 질리게 만들었어.


차라리 파인애플 한 송이를 준비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무척이나 귀여웠을 텐데 말야. 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안중이 없다는 것만 증명해보였지.


나랑 잔 남자들은 너랑 달라. 어리고 예쁜 남자들이냐고? 응, 그런 남자들 좋아하긴 하지. 그렇다고 다들 너보다 잘생기거나 몸이 좋은 남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야. 네 오른쪽 옆옆의 남자는 객관적으로 너보다 못생기고 나이도 많잖아.


내가 잔 남자들에게서 열등감을 느끼라고 말해주는 게 아니야. 객관화를 하라는 얘기야. 그들은 네가 그토록 원했던 내 품에서 아침을 맞이했지. 내 가슴을 원하는 만큼 주무를 수 있었고 입술을 가져가 단단해서 선 유두를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어. 네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했지. 오직 동물적인 감각에만 집중해서 그들의 등을 손톱으로 할퀴거나 그들의 팔에 동그란 잇자국을 남기도록 나를 흥분시켰어. 내게 환희를 가져다주었지. 너와 내가 절대 하지 않은 일을 그들과 했다는 거야. 너랑은 절대 하지 않을 그 일들에 대해서 더 길고 상세하게 말해줄 수도 있어.


내가 나빠? 못돼 처먹은 것 같아? 그런 넌 대체 몇 명의 여자를 가질 때까지 고결한 상태인거야? 내게 고백할 때 죄책감을 해소하려고 여자친구에게도 혹시 같은 반지를 선물했어? 너처럼 센스 없는 남자가 다른 종류의 두 가지 반지를 고를 재능은 없어 보여서 말야.


너의 오입질은 용서가 되고 네가 오쟁이 지는 건, 아니 우리 둘 사이는 그런 관용구를 사용할 수 없는 관계니까 아무에게도 속박되지 않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대역죄라도 되는 것 같아?

어쩜 그렇게 뻔뻔해? 그쯤에서 해. 네 여자친구도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건 알고 있어?


차라리 나랑 자고 싶다고 말하지 그랬어. 그게 너의 진짜 속마음이었잖아. 진실을 가지고 부딪쳤다면 진심은 통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했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여자는 나랑 안 자주는 여자가 아니야.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과 다 자는 여자지.


어설픈 마음으로 나를 찔러보았다면

나는 너에게 최악의 악몽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



inspired by 도끼(DOK2) | 그쯤에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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