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by 오뉴월의 뉸슬

겨울 바람이 소슬히 불어오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와 나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기 위해 차를 탔다. 두터운 외투를 몸에 두르고 올려다 본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꽃이 떨어질 듯 볼이 시렸다. 자동차 내부는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고, 엄마는 시동을 걸자마자 바로 히터를 틀었다. 따뜻한 바람이 차 안을 메꾸며 나는 김이 서린 자동차 창문에 기분을 낙서했다. 하지만 심한 교통 체증 때문에 우리는 공연장을 바로 앞에 두고 시작 시간이 지나가는걸 지켜봐야했다. 엄마와 나는 지하 1층 주차장에 허겁지겁 차를 대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회장까지 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린 탓에 나는 프론터를 눈 앞에 두고 주저 앉아 버렸다.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엄마는 공연 티켓을 발매하려 티켓부스로 향했다. 엄마가 나한테서 멀어지는 걸 본 순간, 어지러워지면서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것처럼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온통 까맣게 변했다. 칠흙같은 어둠에 등줄기가 오싹해졌고, 송골송골 맺었던 이마의 땀방울이 차갑게 증발되었다. 색은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것 같이 검은 공포만이 느껴졌고, 딛고 있던 바닥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기묘한 이야기> 에서 일레븐이 뒤집힌 세계에 있는 듯 무서웠다.


나 홀로 어둠 속을 비행하는 우주 미아가 되버렸다.




© dav1dcohen, 출처 Unsplash



빛도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서 난 정신을 차리려고 발을 움직였다. 서너발자국을 걸으니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쓰러질까 생각하다가 아스라이 말소리가 1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울렸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용하게 들려오는 소음을 따라갔다. 그러자 그 소리는 점차 커지면서 주위에 하얀 빛을 번쩍이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대화소리가 선명해졌다. 나는 그 소리를 향해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달리기를 한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검은 안개가 걷히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내 코앞에 서있었다.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다급하게 엄마를 찾았다. '나는 분명 몇 발자국 밖에 걷지 않았는 데 언제 프론트 앞까지 왔을까?' 잔뜩 찌푸린 눈꺼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생애 처음 '눈 앞이 안 보이는 현상'을 겪으면서 나는 내 몸이 확실히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학교에서 풍경이 뿌옇게 변한 증상이랑 차원이 달랐다. 시간이 흘러서 엄마에게 내가 겪었던 일을 얘기하니 왜 지금 이야기하냐면서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심장내과 전문의에게 혈액검사, 엑스레이, 심장초음파, 운동부하검사 등 많은 정밀 검사를 진행했으나 이상없다는 소견만 나왔다. 친척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받아보기도 했고, 엄마의 지인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들이 "이상없다.", "이런 건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 "아직 다 성장하지 않아서 자라면서 심장도 커지니까 괜찮아질 수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닌데, 난 분명 아픈데.' 나는 한순간에 있지도 않은 증상들을 지어내서 엄마를 속인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하루는 근처 병원에서 성대마비로 목과 가슴 부위 엑스레이를 찍었던 날이었다.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심각하게 바라보더니 심장 쪽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큰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소견서를 써줬다. 이 말을 나오기 전까지 내 증상들이 체력이 약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추측했다. '내가 워낙 운동하는 걸 싫어했고, 학원에 갈 때도 차를 타고 갔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보다 체력이 낮은 거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체력이 좋지 않다고 블랙아웃 같은 현상을 겪을 수 있을까? 1년 전까지 만해도 조회시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뛰어놀은 사람이었다. 원래 체력이 초콜렛처럼 녹아 없어지는거였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의사의 소견으로 벙찐 나는 나조차 나를 속였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나도 내 자신을 믿지 못했었지. 내 몸이 거짓으로 증상을 꾸며내는 줄 알았지. 아, 병이 있었으면 좋겠다. 뭐라도 좋으니까 병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선생님께도 엄마에게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병이 있다면 속 시원하게 체육을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심장이 비상식적으로 뛰고 체력이 급격히 나빠진 게 설명이 되네. 무엇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행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어.' 350년 동안 풀지 못했던 수학 문제가 하나 풀린 느낌이었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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