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인어공주

성대마비

by 오뉴월의 뉸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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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시간개념이 없어졌다

뭘해야 할지도 모르고

뭘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무의미하게



초가을의 냄새가 풍겨왔던 여름밤은 최악의 날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 나는 몇몇의 친구들과 학교 영재 반에서 수업을 들었다. 저녁 9시에 영재 과학 수업이 끝이 나고 담당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과학실 뒷정리를 시켰다. 나는 아무 군말 없이 내 주변 쓰레기들을 치웠다. 그런데 하필 같은 모둠이었던 남자애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치우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졸지에 나는 혼자 꼼짝없이 선생님의 꾸짖음을 들어야 했다. 나는 오해라며 선생님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중요한 순간에 말을 못 하다니. 혹시 선생님께서 나를 좋지 않게 보시면 어떡하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른 선생님들에게 이 학생은 문제가 있다며 주의시키면 어떡하지? 이미 선생님은 나를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아이라고 각인되어있지 않았을까?’ 선생님에게 내 곤란스러운 상황을 전해지 못한 나는 무척이나 억울했다. 종이에라도 적어서 오해를 풀려고 했지만, 이미 선생님은 교실을 나가셨다. '이런...' 발만 동동 거리며 허탈한 마음을 억재시켰다. 머릿속에서 선생님의 화가 나신 표정이 맴돌았다.





순천만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내 목에서는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엄마의 말과 달리, 일주일이 지나도 내 목소리는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집 근처 이비인후과에서는 '성대결절'이라는 질환이라며 한 달간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 말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성대는 단어 하나 내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비인후과에서는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판정을 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달라지는 의사들의 진단명에 불신의 싹이 텄다. 첫번째 병원에서 진료하고 처방한 알약들을 삼킨 지 두어 달이 지났는데도 완치될 낌새가 하나도 없었다.


© jasonrosewell, 출처 Unsplash


주말이 지나면 나는 다시 학교에 나가야 했다. '말을 할 수 없는 학교생활'을 걱정하던 나는 천천히 병원 안을 둘러보았다. 옆에 앉아있는 7-8세 정도의 남자아이가 검은 마스크를 쓴 엄마를 보챘다.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이 시끄러웠다. 이어폰이 없던 나는 귀를 막을 수 없어 조용히 흰 마스크를 썼다. 볼륨이 낮은 텔레비전 속에서는 하단에 수화로 통역을 해주시는 분이 손짓으로 아나운서의 말을 번역하셨다. 수화를 배워야 하나? 아니지,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질료를 받는 것 외에 없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동네 병원은 아침 9시였는데도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1시간의 웨이팅 끝에 내 차례가 다가왔다. 오랜 기다림에 나는 짜증 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직원을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안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중년 남성과 이름 모를 의료기기가 있었다. 그 의사는 나에게 입을 크게 벌려 목소리를 내보라고 했다. 화가 치밀러 올랐다. ‘아니 소리가 안 나오는 데 어떻게 소리를 내라는 거지?’ 나는 억지로 목을 쥐어짜서 갈라지는 음을 만들어냈다. 골룸이 포효하는 소리가 났다.


“음.. 여기 성대가 많이 부어올라있죠?” 멍하니 입을 벌리며 과학실에서 일어난 일을 회상하다 눈을 돌려 화면을 바라봤다. 왼쪽 스크린에 내 성대가 큼지막하게 보였다. “자 다시 아- 해보세요.” 내뱉으니 한쪽이 성대가 다른 한쪽과 달리 움직이지 않았다. “성대마비네요. 지금 보시면 성대가 벌어져 있잖아요. 원래는 이게 딱 붙어야 되는 데...” 마비라는 흔히 들을 수 없는 단어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성대결절보다 성대마비라는 용어는 더 절망적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대결절보다 치료하기 쉽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철저히 수렁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거는 수술을 해야지만 목소리가 원래 상태로 돌아올 거예요. 여기 말고 큰 병원으로 가보셔야 돼요.”



© ly0ns, 출처 Unsplash



눈앞이 캄캄해졌다. ‘난 이제 어떻게 하지? 우선 내일부터 당장 가야 하는 학교는? 발표를 해야지 추가 점수받는 수업도 있는데.' 당장 내일 모래에는 영어시간에 발표 수행평가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무작위로 발표를 시키시면 그때는 어떡하지?’ 다른 과목 선생님들은 담임선생님과 다르게 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얘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비웃진 않을까?'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콱 깨물었다. '내가 들어도 소름이 돋는데.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지는 않을까?’ 언제까지나 말을 하지 않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학교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 가기가 두려웠다.





1년이 지나고서야 나는 평범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나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콧소리를 섞어 편하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떠들썩한 학교에서는 내가 아무리 크게 말해도 못 알아듣기 일쑤였다. 친구들이 (듣지 못하고) 무시할 때면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선생님들은 목소리를 크게 낼 수는 없냐고 짜증을 내곤 하셨고, 목소리가 작다고 지적받을 때마다 자존감이 무너졌다. 나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내 목소리가 좋지 않다는 콤플렉스가 생겼다. 의사 선생님은 대학 병원에서 성대마비 수술을 권유하셨지만, 곧 심장검사에서 이상소견이 나와 무산되었다. 나는 굳어버린 내 오른쪽 성대를 지금까지도 원망하고 있다.


© ddelledo,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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