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을 인정하고 나면 생기는 마법
오전 5시 반 알람이 울린다.
알람을 끄면서 오늘의 쉬프트를 확인하며 하루가 시작된다.
호주 카페에서 일하게 되면 크게 세 가지 포지션이 있는데 바리스타Barista나 쿸Cook이 아니면 대부분 올라운더All Rounder를 맡게 된다.
올라운더All Rounder는 딱히 정해진 포지션이 있다기보다는 주문을 받고 서빙도 하고 설거지도 하는 카페의 전반적인 일을 하게 된다.
내가 일하는 곳은 조그만 카페여서 바리스타, 쿸, 올라운더 이렇게 세 명이서 일을 하는데
세 명 다 다른 포지션의 일도 어느 정도는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돌아가면서 브레이크 타임도 가질 수 있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조그마한 공간에서 복작 거리며 일하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의 일도 내 일처럼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핸드폰 화면을 보며 "오늘은 내가 메인 바리스타네 "라고 생각을 하며 카페로 향했다.
아침 6시 반. 오픈하는 중인데도 모닝커피를 마시는 위한 레귤러 손님들은 벌써 와 줄을 서있다.
걸어오는 손님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이름보다도 마시는 커피의 메뉴가 더 먼저 떠오른다.
플랫화이트 Flat White, 카푸치노Cappuccino, 저 사람은 캡 위드 투 슈가Capp with 2 sugar 그리고쏘이 라테Soy Latte.
그렇게 정신없이 두 시간의 모닝 러시를 쳐내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니 또 다른 도켓(주문서)이 커피 머신 앞에 놓여 있었다.
주문은 카푸치노 1잔.
기다리는 손님의 얼굴을 보니 매일 '라테'를 마시는 분이셨다.
호주는 보통 매일 자기가 마시는 커피가 정해져 있어
늘 같은 시간에 늘 같은 카페에서 늘 같은 커피를 마시는 손님들이 많고, 우리는 그들을 레귤러Regular라고 부른다. 단골손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방금 주문받은 올라운더 친구 메진 에게 물어봤다.
"혹시 저 손님 라테Latte 아니야?"
그러니 그 친구가 짧게 대답한다.
"오늘은 카푸치노 시키던데."
하고는 다시 자기 일을 하러간다.
그래서 손님께 둘러서 "오늘은 카푸치노 마시게?" 하고 물어보니
"응. 오늘은 카푸치노가 먹고 싶네." 하는 것이다.
신기하게 오늘은 수개월간 똑같은 메뉴를 먹던 손님들이 다른 커피를 주문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렇게 메진에게 다시 물어보는 일이 또 생겼고
나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 그 친구는 폭발하게 되었다.
"너 절대 네가 맞다고 가정하지 마!"라고 말하며 부들거리는 친구 앞에서 나는 순간 얼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서 여러 해를 일하면서 더블체크는 기본이라고 늘 생각했기에 그것이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렇게 쫄보인 나는 쿵쾅 거리는 심장을 겨우 붙잡고 계속해서 커피를 만들었다.
여전히 영어가 어렵고 모르는 단어가 많아 분위기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지만, 금방의 경우는 설마,, 할 것 없이 그 친구의 눈빛과 행동에서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리가 복잡했었다. "그래. 기분 나쁠 수도 있지."
"손님이 그렇다는데 내가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니까 얼마나 귀찮았겠어?"
"아니다. 그래도 손님한테 잘못된 커피를 주는 것보다는 확인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저렇게 날을 세우는 거야?"
"아무튼 쟨 정말 성격이 이상해." "대체 오늘은 또 뭐가 기분 나빠서 나한테 저러는 거야?"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한참 맴돌았다.
걔가 "너 의심하지 마."라고 했던 말이 마음속 깊이 와 꽂혔고, 물어본다는 건 니 사정이고 계속해서 자기가 한 일을 다시 확인했다고 느낀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사로 잡혀 떠나질 않았다.
그렇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이내 내 마음은 억울했다.
겉으로는 웃으며 커피를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사실은 손이 덜덜 떨리고 마음속으로는 계속
"쟤 정말 이상한 애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겨우 버티고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바로 남편 John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쏟아 내며 내심 내 편을 들어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전화 속이 아니라 실제로 존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리는 거다.
흥분한 내 목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했다.
괜히 남편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생겼다는 마음에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오빠를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오빠! 걔 진짜 이상한 거 맞지?
"지도 커피 하고 싶은데 내가 바리스타로 들어와서 괜히 나한테 히스테리 부리는 거지? 그지?"
그러니 오빠가 대답했다.
"아니. 걔가 화날 만 한데?."라고
응? 순간 벙쪘다.
내가 잘못했다고?
그런데 그 순간,
그 짧은 순간 뭔가 마음이 받아들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전쟁터로 가고 있던 내 마음이,
평화로운 숲으로 돌아서는 기분이었다.
아, 내가 잘못한 거 구나.
나를 제일 잘 아는 가까운 사람이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얘기해주는 대답을 들으니
오히려 그 상황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매장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더 이상 그 친구가 꼴 보기 싫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마음이 두근거리거나 손이 덜덜 떨리지도 않았다.
그냥 담백하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정말 까지는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내 잘못'이라고 생각이 들고 나서는
별거 아닐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 상황이 객관적으로 바라봐졌다.
나는 매 순간 결정을 할 때 늘 손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게 제일 잘한 선택이고 제일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늘 친절함만 받았던 나는
오늘 이 일이 없었더라면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 볼 일이 없었을 것 같다.
누군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두 번 세 번씩 체크한다면
나라도 '아, 저 사람은 나를 믿지 못하구나. 내가 신뢰감 있게 일을 하고 있지 못하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일하는 곳에서 손님도 중요하고 매장도 중요하고 커피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같이 일하는 친구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라는 쪼잔한 사람은
이 글을 쓴 지 몇 달이 지난 후에야 겨우 이렇게 마무리를 짓고 있다.
- 그러고도 지난 몇 달 동안 메진과 나는 여러 번의 마찰이 있었으나(나 혼자만의 생각일 때가 많음)
지금은 그냥 그 친구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고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도 한 번씩 그 친구와 불편한 일이 있을 때면
나는 이 노래를 듣는다.
장기하- 그건 니 생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