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과 값은 다르니까
아는 것 없이 독일에 와서 살고 있지만, 은근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 정신적으로는 편하게 살고 있다. 내 인생에서 크게 스트레스받았던 적이 몇 번 안되기는 하지만 인생 그래프를 그린다면 2019년부터는 평온의 연속이지 않을까. 덕분에 심지어 신체적으로도 더 건강해졌다.
그중 의외로 가장 잘 맞는 점은 ‘돈에 연연하지 않는 분위기’다. 나는 내가 이런 분위기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독일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다. 같은 유럽인 영국에서 생활하다가 뮌헨으로 놀러 온 친구가 매일같이 말하던 영국과의 차이점 역시 “이곳 사람들은 돈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였기 때문에 그게 며칠 여행으로 온 사람들 눈에도 보이는구나 신기했다. 이곳은 독일 내에서도 그나마 돈에 연연하는 (?) 뮌헨인데도 말이다.
사실 과연 어떤 것이 돈에 연연하는 것이고 아닌지 딱 잘라 말하긴 쉽지 않다. 어느 정도 금전적 여유가 있으니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닌지 의문도 생긴다. 그래도 ‘만약 한국이었다면..’이라는 가정을 두고 보면 차이점은 확실히 보인다.
단박에 느낄 수 있는 것은 가게들의 영업시간. 잘 알려진 대로 일요일은 온 도시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며 음식점 정도만 문을 연다. (일요일에 영업을 한 음식점은 물론 대신 평일에 쉰다.) 상점이나 생필품을 파는 슈퍼마켓, 약국조차도 6-8시면 문을 닫는다. 그중 나에게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카페의 영업시간. 주말에 열지 않는 곳은 이제 놀랍지도 않고, 평일에 다섯 시간 이상 영업을 하거나 오후 6시까지만 문을 열어도 감지덕지다. 5시가 마감 시간이지만 3시에 쿨하게 문을 닫아버리는 곳도 봤다. 퇴근 후 카페에서의 여유로운 커피 한 잔.. 은 안타깝지만 스타벅스에서만 가능하다.
한 술 더 떠서, 개인이 하는 작은 카페에서는 손님의 양심에 맡긴 계산을 하는 경우도 종종 경험한다. 돈을 안 내고 슥 나가버려도 모를 만큼 카운터를 비워두기도 하고, 계산을 한다니까 ‘아 뭐 드셨죠?’라고 도리어 손님에게 묻는 경우도 있고, 계산을 잘못해 돈을 더 적게 달라고 하기도 한다. 영국에서 놀러 온 친구 역시 고 며칠 새 카페에서 이 같은 경험을 했고 그게 인상 깊었다고 했다.
아마 연봉이나 투자 같은 주제로 넘어가면 한국사람들과 독일 사람들은 다른 세계의 사는 것 같을지도 모른다. 내 경험에 한해서지만 한국에서는 직장 선택에 연봉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끔은 연봉 (금액 환산되는 복지 포함)이 직장 선택을 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도 느껴질 정도다. 넉넉한 휴가일수와 더 여유로운 병가, 하나씩은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동호회 활동 또는 가족 중심적 사고방식 덕분일까. 독일에서는 확실히 연봉이 모두의 최고 순위는 아니며 직장 선택의 여러 기준 중 하나로 보인다. 자발적으로 일하는 시간이나 일수를 줄이고 돈도 그만큼 더 적게 받는 사람들 역시 워낙 많으니까. 동호회 활동이나 취미 생활을 본업보다 더 열심히 하는 사람들 역시 많은데, 내 좁은 독일인 지인들 내에선 적어도 정말이지 두세명 빼고는 모두 깊이 파는 취미 또는 동호회가 있다.
최근 남편 회사에서 꽤 높은 직책에 있던 상사 하나는 원래도 파트타임 근무였지만 더 가정에 집중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며 더 적은 연봉과 더 적은 업무 시간을 위해 작은 회사로 이직했다. 우리 팀의 시니어 역시 더 작은 곳으로 이직했는데, 이 역시 대부분 더 큰 회사로 이직하는 것을 선호하는 한국과 다르다고 느꼈다.
투자 쪽으로 넘어가면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이 정도 경제 규모의 선진국 중 자가 소유 비율이 이렇게 낮은 국가는 독일밖에 없다고 한다. 집을 사는 것에 관심이 크게 없고,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집 구매를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집 구매를 생각하는 독일 내 한국인들은 주변 독일인들의 이런 부정적인 의견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고!). 집을 사는 경우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살 집의 개념이 대부분이라 뮌헨 같은 도시가 아닐 경우는 아예 부지를 사서 집을 짓는 것부터 시작한다. 지금 우리 팀에는 두 명이나 집을 짓고 있다. 추가적인 집을 구매하는 경우도 은퇴 후 소소한 부수 수입을 만드는 개념이지 (집 하나의 월세 수입에서 세금을 뗀 후 들어오는 돈은 그리 크지 않다.) 시세차익을 목표로 하는 부동산 투자 개념은 많지 않다. 누구나 부동산 투자에 큰 관심을 가진 한국에 비해 독일에서는 전체적으로 피라미드형 구조에서 상위에 있는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본격 부동산 투자를 하는 것 같다. (친구네 집주인은 뮌헨에만 백 몇십 개의 집을 갖고 있다고 하고, 한 건물 전체를 통째로 소유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한국의 또래 친구들이 숨 쉬듯이 말하는 주식이라는 주제는 거의 들어본 적도 없고 (주식을 하는 친구들은 물론 있지만 한국처럼 사람들과 모여서 대화 거리로 삼거나 매일같이 입에 올리지는 않는 분위기) 암호화폐는 버즈워드로서는 주제가 될 때가 있지만 투자 이야기로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BMW, 지멘스, 알리안츠 등 대를 이어 평생 다니는 대기업인 회사들이 있는 뮌헨이라 안정적이고 길게 가는 생활을 선호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이 ‘돈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바로 봄철이 되면 볼 수 있는 셀프 꽃밭이다. 뮌헨 시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원하는 꽃을 잘라서 가져가고, 비치된 상자에 돈을 넣는 것이다. 봄에는 알록달록 다양한 꽃들이 있고, 가을이 되면 호박이나 감자도 이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있다. 이 꽃밭을 처음 봤을 때는 제대로 수금이 되기는 할까 궁금했고, 조금 살다 보니까 ‘뮌헨에 이 정도 땅을 꽃밭으로 놀리다니 (?!)’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이었으면 서울 시내 곳곳에 이런 셀프 꽃밭을 (본격 농사를 짓는 밭도 아니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오래전 재미있게 읽었던, 강남 노른자 땅에 농사를 짓는 내용의 웹툰이 떠올랐다.
아이러니하지만 중국 생활에서 극강의 자본주의를 느끼고 난 뒤에 한 독일 생활이라 그런지, 돈을 최우선 순위로만 생각하지 않는 이 정신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기준을 나에게 적용해본다면? 나는 자신 있게 돈 앞에 오는 여러 가치를 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