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함 끝에서 만난 해방감
면허를 딴 지는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비게이션 없이는 운전을 못 한다. 내가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속도는 잘 지키며 달리고 있는지, 차로를 바꿀 타이밍은 언제인지 내비가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분명 안내대로 잘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멘트가 울린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괜히 마음이 급해진다. 이러다 길을 찾지 못할까 봐, 괜히 돌아가서 도착 시간만 늦춰질까 봐,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어디서부터 잘못 선택한 건지, 지금이라도 핸들을 꺾어 그 지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진다.
다행히도 내비는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새로운 길을 안내해 준다.
그 말에 안도하며 더 이상 길을 틀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정신을 더욱 네비에 집중한다.
그러다 또다시 “경로를 이탈하여 새로운 길로 안내합니다.”라는 멘트가 나온다.
분명 잘 가고 있는데 도대체 문제지? 내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일단은 안내하는 대로 가보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다시 원래 경로로 합류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다.
두 번째까지는 어떻게든 믿어 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말을 세 번째쯤 듣고 나면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
아, 안 되겠다. 그냥 가보자.
교통표지판의 안내와 나의 감을 믿고 그냥 가본다.
그래봤자, 여긴 대한민국이니까.
조금 돌아가더라도 어딘가엔 도착하겠지 하는 여유가 생긴다.
그때부터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가면 이 길이 나오겠지,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가 본다.
글쓰기도 꼭 그랬다.
방송작가로 일하던 시절,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 우선 선임 작가의 대본을 분석하며 글을 썼다.
어떤 식으로 전개를 하는지, 어떤 표현을 많이 쓰는지, 어떤 톤이 프로그램에 어울리는지.
이전 것과 비슷하게 쓰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프로그램에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었고 그 방향성에 맞는 글만 살아남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프로그램이 필요로 하는 말이 먼저였다.
그건 틀린 일이 아니었다. 방송은 개인의 글이 아니라 팀의 결과물이니까.
시청률과 반응은 내 글쓰기의 가장 분명한 기준이 됐다.
반응이 좋으면 잘 쓴 글, 조용하면 고쳐야 할 글. 제작진의 피드백이 곧 정답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그 기준을 방송 밖에서도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방송을 그만두고 SNS라는 나만의 공간에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생각보다 많이 어색했다.
누가 방향을 잡아주지도 않고, 어떤 말이 맞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글을 쓰는 내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좋았다.
다시 나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틀도, 내비게이션도 없이 오롯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문장을 써 내려갈 때 약간의 불안함과 함께 해방감도 느껴졌다. 이렇게 써도 되나 싶으면서도 그래, 이건 내 글이지 라는 감각.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그동안 정답을 향해 글을 써온 게 아니라 정답처럼 보이는 길만 계속 따라가고 있었다는 걸.
묻지 않기로 했다.
이 길이 맞는지 틀린지,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방향으로 써보자고.
반응이 없을 수도 있고, 조금 어색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문장으로 글을 이어가 보자고.
지금의 문장은 수없이 경로를 이탈했던 시간들 덕분에 만들어졌다. 선임 작가의 대본에서 벗어나 보았고, 프로그램의 밖에서 내 목소리를 찾으려 애썼기 때문에 이 문장이 남았다.
알음다운 글쓰기라는 건
정답을 빨리 찾는 일이 아니라 이탈하면서 배우고, 흔들리며 깨닫는 과정이다.
유난히 베끼기 어려운 글이 있다. 문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색깔이 묻어 있어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글. 그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 길을 벗어나 보았는지의 차이다.
아직도 나는 종종 길을 잃는다. 여전히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제 그 알림은 두렵지 않다.
아, 지금부턴 나답게 가야 할 차례구나.
경로를 이탈한 글쓰기.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약간의 불안함 속에서 묘한 해방감을 찾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