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외노자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하고 싶지는 않다.
듣기만 해도 속에서 분이 차오르는 내가 기분을 느끼고 싶지도, 남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아서 이다.
인종 차별은 아니지만, 스테레오 타입(고정관념)에서 비롯하는 미묘한 차별이 있다.
쨍한 빨간색의 색안경을 끼고 일부러 상대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하는 것이 인종 차별이라면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이것은 옅은 갈색의 색안경을 끼고, 차별하는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하는 무의식적인 차별이랄까...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거의 느낄 일이 없다.
동양인은 영어를 못할 것이라 지레짐작하여 어린아이 다루듯 우스꽝 스러울 정도로 과장해서 천천히 말하는 사람들에게 영어를 못하는 너에 대한 배려라는 포장 밑에 깔려있는 확연한 무시의 표현에 불쾌했던 경험도 있지만 그런 소소한 것들은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대가 이려니 하며 다 흘려보낼 수 있다.
하지만, 돈을 받으며 주 5-6일 하루 9-10시간씩 일을 해야 하는 곳에서 매 순간 받는 옅은 차별은 생각보다 나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동양인이니까, 외국인 노동자이니까, 똑같은 일을 해도 호주 사람들보다 더 빠르고 더 열심히 감사하며 해야 한다는 부당한 기대.
똑같은 단순 노동을 반복해도 손이 느린 호주 직원은 모른 척 봐주지만, 다른 한국인 노동자들보다 조금 느린 한국인 노동자는 (그럼에도 여전히 대다수의 호주인들보다는 빠른) '너 너무 느려' 라며 타박하는 슈퍼바이저, 호주인들끼리 일하며 하루 종일 떠드는 것은 일만 제대로 하면 상관없지만, 가끔 동양인 직원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대화하는 것은 아니꼬워하는 눈빛들
일한 지 일주일 된 동양인 노동자에게는 오래 일한 직원들 수준의 업무 숙련도를 바라지만, 한 달이 넘게 일한 호주인 직원에게는 아직 배우는 중이라며 실수를 눈감아 주는 일. 어쩌다 늦잠을 자서 지각하는 동양인 노동자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일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매일같이 한두 시간 늦게 출근하는 호주인 직원은 아직 어리고 첫 직장이라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이해 해 줘야 하는 사람이다.
사정이 있어 토요일 근무에서 빠져야 한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는 동양인 노동자에게는 돈 좋아하는 네가 돈 더 주는 주말을 빠지냐는 듯 비꼬며 코웃음 치지만, 같은 상황 호주인 직원에게는 빠져야 하는 이유를 궁금해하고 공감하며 걱정한다.
허리나 손목이 아프면 동양인 노동자에겐 내일 출근할 수 있을지를 궁금해 하지만 호주인 직원에게는 지금 다친 것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고생한다는 말을 해준다.
그들에게 우리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 중 하나이고 호주인들은 개개인의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차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필명을 호주에 사는 사람, 외국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굳이 '외노자 J'로 정한 것도 호주에서의 나는 나만의 자아와 삶이 있는 고유한 한 인간이 아닌 그저 한 그룹의 노동자들 중 하나로 카운트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견디며 열심히 오버타임까지 해서 55-60시간 일하고 나면, 한국에서 누군가는 한 달을 일해야 받을 돈을 일주일 만에 벌게 되는 소위 말해 '금융 치료'를 당한다.
외국인으로서 호주인들과 같은 대우는 바라지 않겠지만 (한국도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관대한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해준다면 우리 모두 조금 더 즐거운 호주 생활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