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동 인쇄골목
일몰의 시간을 걷는다면
전나무 숲에 든 듯 바람소리 술렁거린다면
한 사내가 직지인쇄 앞에서 백상지를 옮겨 싣는다면
이제는 떠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늘을 물고 골목이 골목을 버틴다면
신풍인쇄 경성인쇄 경북봉투 기웃거린다면
재전당서포,
여기 어디 즈음이었을까
책을 찍고 책방 열었던 곳
마음의 안쪽을 살피는 일이라면
말씀을 더듬는 일이라면
집채만 한 풀들이 자라는 폐가를 끼고
어둠을 물고 오는 또 한 사내 만난다면
수염이 우거진 듯, 수북한 바람 만져진다면
활자를 고르는 힘겨운 생
손끝으로 먹그늘나비 퍼덕이는 허기를 부른다면
비로소 책판이 짜여진다면
이곳과 저곳의 전언이 통과하는
고금
긴 여운의 눈빛을 가로지르는 눈빛이라면
어느 곳으로든 열리는 이 골목
흰오리*로 지켜내는 일이라면
뒤돌아보면 거기, 길을 물었던 적이 있다
* 1907년 무렵부터 1930년 초까지 목판 인쇄본인 방각본으로 서적을 출간하고 팔던 곳
* 하얗게 센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