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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나 Nov 30. 2020

3. 도깨비 아줌마

거듭되는 사업실패와 처자식보다는 타인을 더 중요시 여기던 아빠를 만난 탓일까. 부족함 없이 자랐던 엄마는 돈돈 거리며 아빠를 잡아먹을 듯한 도깨비가 되었다. 엄마는 시집을 오고 나서 기함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나 없는 집이 있다니. 노처녀라 불리는 나이가 되고 나서야 엄마는 결혼을 했고 그 결혼이 아마 엄마에겐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연스레 언니와 나는 그러한 상황을 인지한 채 성장했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해달라고 떼쓰지도 않았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난한 생활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 가난 안에서 소소하게 행복을 만들며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올리기도 전에 엄마 손에 이끌려 아르바이트를 했다. 엄마의 제안에 4년제 대학 내가 원하던 학과의 합격을 포기하고 취직에 수월하다는 2년제 디자인학과에 입학 했다. 대학 졸업식을 올리기도 전에 미술학원에 취직을 했다. 이 모든 게 엄마의 뜻이었지만 내 선택이기도 했다. 저항 한 번 안 하고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엄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갑갑하기도 했다. 하루는 친구 만나러 외출을 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말했다. 

“또 친구 만나러 나가니? 친구들 만나고 다니면 돈 들잖아!”

“엄마나 평생 친구 만나지 말고 살아!!”


급여의 70프로를 엄마에게 주고 분기별로 받는 상여금을 엄마 몰래 모아 1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다녔다. 초반에는 상여금도 전부 엄마에게 줘야 했지만 나중에는 상여금이 줄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정말 빠듯하고 갑갑한 생활이었지만 지금 20대를 돌아보면 나름 행복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4년제 대학을 다니지 못했어도, 일찍부터 경제활동을 시작해야만 했어도, 백화점에서 브랜드 옷 한 번 사보지 못했어도 불행하지 않았다. 없는 돈 쪼개 모아 소소하게 여행도 다니고, 연애도 했다. 우리에게 지원은 해주지 못해도 더 이상 우리에게 짐이 되거나 걸림돌이 되지 않게 애쓰는 엄마에게 감사했다. 없이 살아도 더 이상 빚지지 않고 살 수 있음에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디가 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성이에요’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돌팔이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돈돈 거리는 억척 아줌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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