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아빠 눈을 피해 집 담장을 넘어 다니며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남의 집 계단을 타고 다니며 여기저기 전단지를 뿌리고 다녔다.
밥 먹듯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유흥을 즐기러 다녔다.
끼니도 잘 챙기지 못해 야윈 몸으로 일꾼들을 잔뜩 태운 커다란 차를 끌고 다니며 인천 곳곳을 다녔다.
딱딱한 공무원 제복을 입고 있어도 자유분방함과 당당함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되도록 시원하고 가벼운 아웃도어 의상만을 입어도 언제나 몸은 무겁고 얼굴은 늘 지쳐있었다.
어른들이 결혼을 걱정할만한 나이가 되어도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들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자식들의 효도와 손주들의 재롱을 봐야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 어느 하나 누려보지를 못했다.
나름의 화려했던 청춘을 누리던 그녀의 말년은 꽤나 암울했다.
10여 년을 하던 보험 일을 그만둔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전단지를 뿌리는 아르바이트라고 했다. 나도 대학 때 잠깐 해본 적이 있던 터라 하지 말라고 말렸다.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 일을 재미있어했고 결국엔 그 일을 인수하여 본인이 직접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만 있으면 더 아파.”
“일 할 수 있을 때 까진 계속해야지.”
“엄마 사주에는 나무가 있어야 한 대. 그러니 종이로 만든 전단지 일이 엄마한텐 맞아”
인천 전 지역, 가끔은 서울이나 경기도까지 전단지를 배포하러 다녔다. 아침 6시에 나가서 밤 12시까지 돌린 적도 있다. 백수 시절 엄마를 잠깐 도왔을 때 내 몸무게는 46킬로까지 빠졌다. 엄마는 이런 일을 10년을 넘게 했다. 나보다 키도 훨씬 작고 몸무게도 훨씬 적게 나가지만 내가 무거운 전단지를 들고 끙끙거릴 때면 쯧쯧 혀를 차며 대신 옮겨주었다. 억척스럽고 종종 폭군과도 같던 사람. 이러한 성격 때문에 우리 엄마를 견뎌내지 못하고 떠나가는 직원들이 부지기수. 하지만 마음은 굉장히 여리고 정이 넘치는 사람. 또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오랜 시간 엄마 곁에서 일을 해준 직원들도 있다.
10여 년을 종횡무진하며 일했던 엄마 덕에 인천 어디를 가도 엄마 생각이 난다.
“앗! 저기 전단지 돌렸던 동네다!”
“저기 전단지 돌렸던 그 아파트 맞지?”
빌라, 아파트, 오피스텔, 상가, 계약 맺은 동네 마트들. 인천 곳곳에 엄마의 땀방울이 떨어져 있다. 오로지 나와 언니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던 엄마의 에너지가 흩뿌려져 있다.
너무 과하게 에너지를 쏟아 부어 일을 하던 엄마는 결국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