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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Aug 14. 2020

생존 필라테스

아이들이 한창 어릴 때는 몸이 어떤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파도 아픈지 몰랐고, 끙끙거리며 자다가도 애가 울면 다 잊어버리고 젖을 물리고 달랬다. 첫 아이를 낳고 자꾸 살이 빠지자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방문하실 때면 죽과 나물 반찬,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잔뜩 해와서 냉장고를 가득가득 채워두셨다. 엄마가 열심히 냉장고를 채워주지 않았다면 정말 피골이 상접하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엄마의 걱정은 결국 무용하지 않고 나를 살찌웠다. 내가 애를 키우는 동안 엄마는 언제나 그랬다는 듯 다시 나를 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과 육아가 점철되어 있던 몇 해간 몸이 많이 망가졌던 것 같다. 첫 아이를 낳고 매일 밤 다리가 생긴 인어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 밤들, 보이지 않는 땅을 내디디며 밀려오는 저릿한 통증을 감내하며 아이를 길렀다. 출산 후 어떻게 관리해야 몸이 망가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 스스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이 들기도 한다. 그 시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몸으로 때우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독일로 나오기 전 몸 전체를 점검하고 나왔다. 한 번씩 일하기를 거부하는 허리도 정형외과 가서 보고, 썩어서 부러진 채로 내버려 뒀던 이도 번쩍번쩍 금니로 만들었다. 산부인과에도 들러 꼼꼼하게 점검하였다. 낯선 땅에서 낯선 언어로 얼마나 내 몸을 살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한국에서도 나를 돌보는 일은 항상 순위의 저 밑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남편도 여기저기 고장 난 곳이 많았다. 눈이 자꾸 건조하고 벌게져서 눈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 안경을 써야 했고, 중학교 때 이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아토피 피부염이 심해져 그리 많지도 않은 수면시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심할 때는 한포진이라는 수포가 손에 올라왔는데, 견딜 수 없이 가렵다고 했다. 웬만한 고통은 넘어가 버리는 그도 약도 먹어보고 황토도 발라보고 결국엔 주사 포비아도 무릅쓰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기 원했다.



독일로 오자 남편의 고질병들은 말끔히 나아졌다. 안경은 어디 뒀는지 모를 정도로 눈이 멀쩡해졌고, 가려움증은 가끔 찾아오긴 했지만 매일 밤을 괴롭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모든 병은 과로와 척박한 근무환경, 그리고 스트레스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모든 환경이 좋아졌는데, 내 병은 오히려 심각해졌다.

몸의 관절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실재하지만 추상의 세계에 속한 듯했다. 관절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전혀 체감하지 못한 채 다만 사용했다. 어느 날부터 자려 누우면 손가락이 어떻게 분절되어 있는지 깜빡깜빡 불이 들어왔다 갔다 반복하듯 화끈거리며 일깨운다. 나의 손이 일할 수 있게,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관절들. 옴 몸에 자리 잡은 소중한 관절에 대해 줄곧 생각하게 됐다. 잊을라치면 통증으로 존재를 알려왔다.



필라테스라는 걸 시작했다. 출산하고 나면 뼈가 많이 틀어진다고 했다. 특히 골반은 많이들 틀어진 채로 산다고 했다. 세 번의 출산을 했지만 한 번도 비틀어진 몸을 바로잡아본 적이 없었다. '아, 이렇게 평생 아프다, 죽는 거구나.’ 싶던 순간에 운동을 시작했다. 집 밖으로 나가긴 힘들어서 너튜브의 힘을 빌었다. 널리고 널린 게 홈트레이닝 영상이었고, 따라 하기 정말 좋은 영상들이 많았다. 매달 트레이너에게 비용을 지불하진 않는 대신 요가매트와 폼롤러를 사들였다. 남편은 적극적으로 건강해지겠다는 나의 결심을 지지했다. 하지만 며칠 운동하여 죽을 것 같은 몸이 조금만 나아지면 곧 운동 없는 생활로 복귀했다.

(좌)다리가 짧아서 그런거니 유연해서 그런거니 쉽게 닿는 바닥 (우) 이 자세에서 고개만 왼쪽으로 돌리면 골반 교정에 좋습니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허리가 좀 안 좋다 싶었다. 며칠 고생하고 나면 나을 허리라 생각하고 무신경하게 지냈다. 그랬더니 통증은 점점 아래로 내려와 왼쪽 엉치뼈 부분부터 뒤쪽 허벅지, 뒷무릎을 타고 내려와 종아리와 발목까지 아팠다. 그냥 좀 아픈 게 아니라 동행하기엔 너무 강렬해서 통증에 전복된 것 같았다. 한 번씩은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일상생활은 물론 어려웠는데, 그나마 깨어 있는 시간은 그럭저럭 어떻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공포의 밤이 왔다. 잠을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누워 있는 자세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쩌다 아프지 않은 자세를 찾았다 싶어도 곧 귀신 같이 통증이 쫓아왔다. 코로나 시대가 막 시작되어 모든 활동에 강력한 제한이 있던 나날이었다. 병원을 찾아가고 긴 밤을 보내던 날들에 대해서는 [생존 일지]에 기록했다.


이것은 지렁이가 아닙니다. 한 인간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형상입니다.

병원에서 맞은 주사도 의사 선생님의 다정함도 통증에 별 효과가 없어 동네에 있는 물리치료실 중 하나를 찾았다. 의사의 Überweisungsschein(소견서)이 없이는 치료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야박하단 생각이 들긴 했지만,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정형외과를 다녀왔지만, 소견서는 써 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지금 죽을 것 같다고 호소(실제로는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했을 뿐이지만)했더니 주치의(주치의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고 매번 가는 가정의학과 선생님이다)에게 소견서를 받아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옆에 있는 주치의의 병원으로 달려갔다.(달려가진 못하고 절룩거리며 갔다) 접수와 다양한 행정을 모두 맡아 처리해 주는 직원(간호사 인지도 모른다)이 다리가 아파서 똑바로 서지 못하는 건데, 내가 똑바로 서 있지 않아서 아픈 거라고 말해서 화를 낼 뻔했다. 그래도 예약 없이 갔는데, 의아해하면서도 소견서를 써 주셔서 용서하고 얼른 다시 물리치료실로 갔다. 2주 후로 예약을 잡아줬다. 지금 잠을 잘 수 없는데… 나의 절박함과는 상관없이 매정하게 돌아가는 예약 시스템이었다. 고통의 나날들이야 말해 뭐해, 덕분에 [왕좌의 게임]도 보고 글도 썼다지. 물리치료실을 갈 즈음에는 많이 좋아져서 점점 한 번에 잘 수 있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었고, 온라인 필라테스 수업도 필사적으로 따라 하고 있었다. 좌골신경통에 좋다는 동작은 모두 익혀서 틈이 날 때마다 했다. 그렇게 필라테스의 세계로 강제 진입하여 몇 달을 살았다. 그 어느 때 보다 열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푹 잠을 자고 절지 않고 걷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일상은 곧 되찾았다. 심한 경우 6개월 넘게 증상이 지속된다는데 천운이라 생각했다. 흉터 같은 희미한 통증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이내 좌골신경통도 필라테스도 잊고 살게 되었다. 다시 몸이 삐걱거린다 싶었을 땐 이미 마음도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마음의 문제라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몸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문제 해결이 심플해졌다. 건강해지면, 체력을 키우면 되는 것이었다. 몸의 문제는 추상적이지 않았다. 물론 의지력은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왔지만, 할 수 있는 무언가, 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꽤 희망적인 일이었다. 눈앞에 잡을 수 있는 해결책이 있는데도 실천은 요원했다. 친구들과 여행 간 날 밤, 오후에 마신 커피 두 잔과 잠자는 시간을 넘겨 버린 탓에 잠을 자지 못했다. 새벽녘에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익숙한 목소리와 조심조심 움직이는 친구들의 움직임이 슬몃슬몃 의식 사이를 비집고 온다. 같이 자는 친구에게 방해가 될까봐 거실로 나와 있다 거기서 잠들었던 것이다. 일어나 보니 같은 방을 썼던 두 명이 이르게도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더 자려면 자신들의 방으로 가 자라고 했다. 여행이 끝난 게 아니어서 다시 자보려고 방에 들어가 누웠는데 이미 사방은 환하고 의식은 아직 카페인의 영향권에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운동이나 하자 싶어 친구들 곁으로 가서 따라 했다. 곧 한 명의 친구가 더 나와 함께 했다. 늘 하던 동작이었는데, 그 새 몸이 또 굳어 잘 되지가 않았다. 움츠리고 있던 몸을 쭉쭉 폈더니 잊고 있었던 좌골신경통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리를 주도하는 친구가 제일 잘했고 우리는 모두 비명을 지르며 엉성한 자세를 취했다. 마무리로 국민체조까지 하고 나니 무거웠던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 분명 알고 있는 상쾌함인데, 아침에 하는 필라테스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게 아닌데, 그동안 이 좋은 걸 안 하고 또 점점 굳어져 가고 있었나 싶다.


같이 동인지를 하는 <My Fresh Banana> 작가들과 매주 하나의 앙케트 질문을 받고 답을 서로 나눈다. 이번 주 질문은 “하고 싶어! Best 5”이다. 평생을 살면서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란 것이었다. 나의 리스트를 적는데 나도 놀랐다. 그중 세 개나 몸과 관련 있는 것들이었다. 격투기 배우기, 가슴이 터지도록 뛰고 걷고 자전거 타고 여행하기, 남은 생을 건강하게 살기. 다른 건 이해돼도 뜬금없이 격투기라니, 싶을 수도 있다. 사연이 있는 리스트이다. 아들 셋의 스트레스와 에너지를 마음껏 풀어낼 수 있도록 얼마 전에 샌드백과 글러브를 샀다. 물론 글러브는 가족 수 대로 샀다. 저녁식사 이후 남편과 짧게라도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운동하기 전에 샌드백을 세게 치고 발로 차기도 해 봤다. ‘와! 난 이렇게 공격적이 여자였어!’ 정말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고 짧은 시간에 금방 심장이 두 방망이질 쳤다. 스트레스처럼 나도 날아갈 것 같았다. 제대로 격투기를 배워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수비력과 공격력까지 키우면서 이 운동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드디어 적성에 맞는 운동을 찾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평생 내 몸에 만족하고 살았는데, 점점 늘어지는 살과 깊어가는 주름에, 자주 못 살게 구는 통증이라는 녀석 때문에 몸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쿵 쿵쿵.

거친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다. 살아있다는 실감을 해야 늙어가고 있다는 서글픔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부터 우리 가족 휴가 시작이다. 내일 오후부터 시작되었어야 할 휴가를 당긴 이유는 둘째가 기침을 하기 시작해 ‘조기 방학’을 했고, 셋째는 모두 집에 남는데 자기만 유치원에 가기 싫어해 오늘부터 ‘덩달아 방학’을 했다. 가족들 모두 휴가가 시작되었는데, 집을 떠나지 않는 이상 나는 퇴근조차 할 수 없어 온종일 아이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다 저녁을 먹고 나선 “이래선 안 돼!” 하고 혼자 자전거를 타고 뛰쳐나갔다. 아이들은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지*을 부리면서 힘든 티를 팍팍 냈더니) 고분고분 보내주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방치했던 몸을 깨운다. 자전거를 타고 나간 길 위에 늘 발코니에서 붙박이고 서 보던 풍경이 잡힐 듯 다가온다. 석양이 날개를 펴고 난다. 잠시를 살더라도 붉게 날아오르다 가고 싶다.


자전거와 날아가는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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