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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둔형 최작가 Dec 03. 2021

연말 증후군

2021. 짧은생각#4.(211203)

Heemskerck and Barents Planning their Second Expedition to the Far North (1862), Christoffel Bisscho

  ‘연말’이 느껴진다. 코끝이 찡하게 춥고, 컨디션이 바닥이다. 즐겁다는 기분보단, 어떻게든 올 한 해를 버텨낸 나 자신에게 놀라움을 느낀다. 해냈다. 살아냈다. 평소에 소식도 없는 이들이 연말만 되면 꼭, 만나야 한다고, 꼭, 술 한 잔 함께해야 한다고 했다. 이맘때면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 내게 연말은 ‘안도’, ‘한숨’, ‘지침’이라는 무쇠 틀에 지난 일 년동안 녹아내린 나 자신을 붓고, 매년 동일한 모습으로 찍어내는 과정과 같다.


  녹아내리는 일 년의 끝, 새로운 일 년을 시작할 즈음엔 어김없이,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계획을 세웠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꿨다. 최소한 내 주변에는 리얼리스트가 없었다. 금주나 금연이 그나마 현실 가능성이 높았다. 부자, 건강, 똑똑, 합격같이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이상에 가까운 계획이 대부분이었다.


  오들 거릴 만큼 추운 계절이 또. 다시. 돌아왔다. 뭐라도, 아니, 최소한 계획이라도 세워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은. 계절 탓일까.


  운동으로 건강해진다거나 공부해서 똑똑해진다 같은 계획은 꿈에 가깝다. 삶의 관성을 완전히 뒤바꿔야 이룰 수 있는 꿈. 아주 간혹, 평생 동안 한 번도 운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일 년 만에 운동을 통해 건강해졌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곤 한다. 이런 경우도 꿈을 이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차지하고 있던 나태한 인간이 사라졌고, 그렇게 생긴 공백을 부지런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새로운 관성을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되었다고 평가함이 적절하다. 나태한 사람이 꿈을 꿨다고, 나태한 관성을 간직한 채 건강해질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걸 시청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휴먼 다큐에서 ‘마침내 꿈을 이루고야 말았다’는 그의 마지막 멘트를 보면서, 소파에서 꿈틀거리며, 힐끔 티브이를 훔쳐보던 나는 ‘저건 꿈을 이뤘다기보단, 꿈에 근접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거지’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연말이 되면 습관처럼 설정하는 ‘내년’의 계획에는 현실성이 없고, 이상만 꿈꾸는 경우가 많다. 그런 계획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로또 1등도 매주 당첨자가 나오니까. 계획의 성공은 무조건 가능하다. 다만, 그 성공은 나의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일 뿐이다. 올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어제보다 더 쌀쌀해진 날씨,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인가. 갑작스레 ‘아차’, 조바심이 났다.     


  학원이라도 다녀볼까. 하다가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이라는 뉴스에 맘을 돌렸다. 그래도 곧 마흔인데,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맞아. 이건 연말 때문에 하는 뻔한 계획이 아니라. 인생의 전환기에 누구나 꼭 해야만 하는 제2의 인생 설계에 가까워’라고 생각했더니, 희한하게 작년과는 달리 안심이 됐다. 무의미한 계획을 또다시 반복하려는 ‘한심한 자신’에게 신경이 날카로워지려던 참이었는데, 나를 향한, 나의 구태의연한 태도에 대한 불쾌함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우선 올해를 잘 마무리하고, 마흔을 앞둔 내년엔 뭘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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