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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둔형 최작가 Dec 15. 2021

시시한 추억

2021. 연습#11.(211215)

Blue Gray Violet Wheel (1934), Joseph Schillinger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렀던 건 스무 살이 되던 해, 다들 봄이라 했지만 여전히 눈발이 날렸던 계절의 끄트머리였었다. 그땐 봄이었을까. 여전히 겨울이었을까.


  아직 가을의 바짓가랑이를 놓지 못하는 겨울의 한 복판에서 잊었던 기억,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기에 나의 경험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그때가, 무엇보다 그가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계절 탓일까.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빼빼 마른 몸매였다. 갈비뼈가 앙상했고, 얼굴을 갸름했다. 그때 당시, 갓 스무 살이 되었던 남자애들의 평균, 딱 그 정도였다. 성별을 따지지 않고, 샤기컷에 부츠컷은 모두가 좋아하던 유행이었다. 딱. 한 사람. 그를 제외하곤 모두가 따랐던 젊음의 규칙이었다.


  우리를 지배했던 유행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삐삐도 있었고, 씨티폰도, PCS를 거쳤고 폴더에 스마트폰까지 유행은 계속 이어졌다. 뭐,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기억 속 추억의 흔적은, 문신처럼, 오래된 상처처럼. 흐릿하지만 여전히 그날의 기분을 쉽게 떠올릴 수 있게 한다. 그 당시, 그에 대한 추억의 흔적처럼.


  매일 술을 마셨고, 술이 술을 마셨고, 기억이 술통에 빠졌고, 술에 젖어 하루를 보냈다. 이틀, 사흘, 한 달, 서너 달, 결국 꿈꿔왔던 대학 첫 학기는 꿈처럼, 숙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로 보냈다. 12개월, 4개 분기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염색도 했다. 물론 시험 기간 한정이긴 하지만, 공부도 했다. 바른 삶을 위해 애쓰지 않았다. 즐거우면 됐다고,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나의 건강은, 거의 완벽하게 망가졌다. 몸은, 나이는 어른인데, 여전히 소심한 아이에 불과했던 나는. 병원으로 가는 날엔 부모님도 내 건강에 대해 다 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땐 나의 아픔보다, 부모님이 내 방탕한 생활을 알아차리는 게 더 두려웠다. 며칠이고 멀쩡한 척, 고통을 숨겼다. 아픈 나에게 말을 걸어준 건, 청학동 학생들처럼 오대 오로 가르마 탄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남방 위에 스웨터, 갈색 바지, 검은 구두를 신은 그였다.



  “너 아프지?”


  “무슨 소리야. 나 괜찮아. 그리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땀을 흘리잖아, 지금 추운데”


  “조금.. 더운 거야 그냥. 그냥 가던 길이나 가”



  좁은 캠퍼스에선 누구든 쉽게 만나고, 스친다. 친구나 선배도, 교수님도, 심지어 보일러나 에어컨 같은 시설을 봐주시는 직원분들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은 마주친다. 그런데, 그날 나에게 말을 걸었던 그는, 몇 개월 만에 마주쳤다. 모두가 똑같은 옷차림, 비슷하게 정돈된 머리카락 사이에서 청학동 오대 오 스타일에 갈색 바지는 먼 곳에서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기묘한 우연의 만남으로, 난 그에게 처음으로 궁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너, 어디 다녀온 거야?”


  “수업 끝나고 왔지, 어딜 다녀오다니?”


  “아니, 최근에 꽤 오래 학교에서 못 봤던 거 같아서”


  “난 별일 없었는데, 학교엔 매일 왔었고, 난 너 매일 봤어”


  “나를 매일 봤다고? 그럴 리가. 난 매일 학교에 있었어”


  “응 알고 있어, 매일 학교에 있었고, 난 그런 너를 매일 봤고”



  두통도, 복통도 너무 심해진 탓에 더 적극적으로 추궁하지 못한 탓에 아직까지도 미련이 남는다. 그날 이후, 그가 나의 눈에 들었다. 그의 말처럼, 검은 구두, 포니테일에 갈색 바지를 입고, 매일같이 내 주변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아픔을 들킨 이후로, 그와 마주치는 횟수도, 그리고 대화의 기회도 늘었다. 거절당하긴 했지만, 한 번은 내가, 같이 식사하자고 제안한 적도 있다.


  이후로 몇 번의 만남, 몇 번의 대화 속에서 그는 나의 안부를 자주 물었다. 아픈 건 괜찮은지, 더 아프지 않은지, 술을 끊어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내 건강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복잡하게 내려앉아 있는 안개처럼 시야를 맴돌던 술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주변은 금세 말끔해졌다. 그렇게 난 그를 보며, 나의 새로운 생활을 하나씩 쌓아 나갔다. 호감일까. 관심일까. 외로워서였을까. 그와의 마주침이, 짧고 형식적인 물음까지 설렘으로 느껴졌다.


  그와, 조금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었다. 또 설렘에 대한 맘의 갈피를 확인하고도 싶었다. 그와 스칠 때마다 습관처럼 밥을 먹자고, 차를 마시자고 했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그의 거절은 언제나 정중했고,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제안과 거절이 오갔고, 마침내 식사는 불가능했지만, 여느 짧은 만남보다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 근사하진 않아도 편하게 그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위해 주변을 훑었다.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게다가 담배연기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학생회관 뒤편, 6월의 뜨거운 태양을 피할 가림막 하나 없었지만, 조용하게, 그에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와의 특별했지만, 시답잖은 내용의 대화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를 뜨겁게 달궜다. 몇 번의 대화가 짤막하게 오가면서 맥박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크게, 더 크게 뛰었다. 그날의 대화가 기억나진 않지만, 그날 그의 푸른 남방과 베이지색 바지, 유난히 창백했던 그래서 빛나 보였던 얼굴, 여전했던 검은 구두와 포니테일만은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는 잠시 휴학을 한다고 했고, 나 또한 입대를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렇게 짧은. 몇십 분의 뜨거웠던, 황홀한 대화가 그와의 마지막 추억이었다. 흔한 연애도,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한 내가 바보 같았다. 입대를 앞두고 한 달은. 다시 한동안, 최소 2년은 볼 수 없게 된 그가 벌써부터 그리웠고, 그리워할 2년을 생각하니, 그리움이 짠한 통증이 저릿하게 밀려왔다.


  난 계획대로 2주 후에 입대를 했다. 2년, 휴가를 나올 때마다 학교를 들렸다. 당연하게도 만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난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 우리가 마주쳤던 장소를 찾았다. 내일 당장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벤치도,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웠던 재떨이 옆 그늘도, 150원 하던 자판기 밀크커피도, 부단히 돌아다녔지만, 역시나. 그와 마주치거나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순 없었다.


  전역을 한 뒤로도, 그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학과 사무실에서는 그가 학교를 그만뒀다고 했다. 아무도 사정은 몰랐다. 간결하게, 흔적도 없이 그는 사라졌다. 어떤 사람은 그가 애초부터 지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편입을 했다고 했다. 간혹, 강남 어딘가에서 몰라보게 달라진 그와 마주쳤다는 소문도 들었다. 정말. 잘 지내고 있을까.




  어제저녁, 공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4살짜리 아들이 나에게 물었다.


  “아빠 공룡은 사라졌나요?”


  “응 공룡은 사라졌지”


  “왜요?”


  “정확하지는 않은데, 어떤 사람들은 지구에 운석이 충돌해서, 그 충격으로 공룡이 사라졌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길고 긴 빙하기가 시작되면서 공룡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그럼 이제 공룡은 없어요?”


  “응.. 없는데, 있기도 해”


  “진짜요? 어떻게요??”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거야. 나 혼자만 생각할 수 있는 공룡의 모습을 머리로 그리고, 기억하는 거야. 상상할 수 있다면, 상상에서 만이라도 공룡은 존재할 수 있으니까”



  가족이 모두 잠든 시간, 다시 거실로 나왔다. 한참을 멍하니, 눈부신 LED 전등 밑에서 상상을 했다. 길었던 머리, 포니테일, 남방과 스웨터, 무엇보다 검은 구두. 찬장 깊은 곳에 묵혀있던 믹스커피 한 봉지를 꺼내 뜯었고, 뜨거운 물과 함께 컵에 부었다.  호로록. 믹스커피가 밀크커피였나 싶었다. 시시한 말장난 같았던, 다시 호로록. 특별한 내용 따위 없었던 그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나의 건강을 염려 해던 말투와, 단어, 또 단어 사이에 옅게 껴있던 얇은 숨소리, 뜨거웠던 그 마지막 날과. 처음으로 그를 인지했던 날이 오묘하게 오버랩되면서 그와 함께 했다고 느끼는 추억이 하나의 장면으로 겹쳐졌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에 대한 추억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추억으로 솟아오른다.


  내가 기억해낸 그를 상상했다. 뜨거웠고 추웠던 나날들의 변치 않은 검은 구두와 포니테일을 간직한 그를 좀 더 섬세하게, 더 매끈하게 그리기 위해 애썼다. 그토록 그리웠고, 궁금했고, 그렇게 잊혔던 그를. 또, 나의 상상으로 다시금 내 앞에 존재하게 된 그에게 말했다.



  “역시나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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