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시정
윤호 시점 – 1화. 사진 한 장, 약속한 줄
나는 열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 식탁에선 웃음이 사라졌고, 어머니는 이따금 창문 틈을 바라보다 말없이 눈을 훔치셨다.
장충동 골목, 언덕을 올라가면 나오는 조용한 기와집.
그곳에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크고 깊었지만, 큰아버지 댁이 바로 옆이라 그나마 숨 쉴 틈은 있었다.
큰아버지는 철물점을 크게 하셨고, 그 무게감 있는 일터에서 나는 부쩍 일찍 어른이 되어갔다.
스무 살이 넘어가던 해의 봄, 어느 날이었다.
할아버지 사랑방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반듯한 양복 차림에 깔끔한 말투, 눈빛엔 말 못 할 사연이 담겨 있었던 그 사람—
그가 바로 정숙 아가씨의 아버지였다.
두 분은 오래도록 말없이 앉아 계셨다.
말보다 눈빛과 침묵이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안채에서 끓는 보리차 냄새를 맡으며 두 사람의 낮은 목소리를 엿듣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소란스러웠다.
그분이 돌아가신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검은 목재 서랍을 열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윤호야, 이 사람 어떠냐.”
나는 순간 어색하게 웃었다.
사진 속 소녀는 한복 윗저고리를 곱게 입고, 눈을 정면보다 살짝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듯한 얼굴. 단정한 머릿결. 그리고 잔잔한 미소.
“예쁘네요.”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 한 마디뿐이었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한 번 하시고, 사진을 나에게 건넸다.
“네 아비가… 살아 있을 때 정해놓은 혼처다.
그분 하고 약속한 거야. 우리가 어려울 때, 그분이 손 내밀어줬지.
사람은… 빚보다 약속을 더 지켜야 한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대충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저 ‘이젠 결혼을 해야 할 때인가 보다’라는 막연함과,
‘이 사람이 내 아내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낯선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 집은 시골이다. 삶이 고단할 거다.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그 집 사람들은 마음이 단단하더구나.”
그날 밤 나는 그 사진을 다시 꺼내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소녀는 말이 없었지만,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사람 같았다.
어쩌면, 그 걸음에 나도 조심스레 따라붙게 될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해 봄,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조용히 한 문장을 되뇌었다.
‘사람은, 약속보다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말이 결국, 나를 기차역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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