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시점
윤호 시점 – 2화. 마을의 첫 방문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시는 목소리가 들렸다.
“윤호 군?”
돌아보니 반듯한 양복을 입으신 분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셨다.
사진으로만 뵈었던 정숙 아가씨의 아버지.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두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얼굴 보니 내 마음이 놓이는구먼.”
그 말 한마디가 어쩐지 가슴을 따뜻하게 데웠다.
처음 뵙는 자리였지만, 그분은 전혀 낯가림 없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서울에서 내리자마자 시골길을 걷는 게 어색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바람과 흙냄새가 익숙해지는 기분이었다.
“여기 면사무소가 내 일터요.
큰일은 없어도 마을 사람들 서류며 이장 일, 농협일 두루 살펴야 하니 바쁘다 바빠.”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는 웃으셨다.
그러다 어느 골목 끝에서 작은 기와집 하나를 가리키셨다.
“저기가 우리 집이네.”
마당엔 국화가 몇 송이 피어 있었고, 옆쪽 장독대가 가지런했다.
집은 작고 소박했지만 참 아늑해 보였다.
나는 들고 온 정종 한 병과 큰아버지가 챙겨주신 한과 상자를 건넸다.
“별것 아니지만… 맛있게 드셨으면 합니다.”
“이런 걸 또 챙겨 왔나. 마음만으로도 충분한데.”
식사는 정갈하고 소박했다.
반찬 하나하나에서 손길이 느껴졌고, 어머니는 말없이 내 밥그릇에 반찬을 몇 번이나 더 얹어주셨다.
정숙 아가씨는 말이 없었고, 식사 내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방 안은 조용히 따뜻했고, 가끔 웃음소리가 마당 너머에서 흘러들었다.
그 집에는 정숙 외에도 어린 처제들, 그리고 처남 되는 아이들이 제각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누이는 흙바닥에서 구슬을 튀기고 있었고, 남자아이 하나는 나를 훔쳐보며 물끄러미 서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아버님은 사랑방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가 앉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졌고, 어느새 돌아가신 내 아버님의 이야기로 흘렀다.
“자네 아버지, 참 의리 있는 분이셨지.
내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 갈 데도 없고 돈도 없고… 한참 막막할 때
자네 아버지가 자기 방 내주고, 이불까지 챙겨주었네.
사람이란, 그런 걸 평생 못 잊는 법이지.”
아버지의 이름을 타인의 입에서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따뜻한 것이란 사실에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그 인연이, 오늘 자네를 여기로 이끈 거라 생각하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그날 나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인연이 얼마나 깊고 다정한 것이었는지를 처음 실감했다.
그리고 그 인연 앞에서, 내가 가벼이 굴어선 안 되겠다는 것을
그 집 마루 끝, 조용한 국화 향기 사이에서 다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