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 시점
윤호 시점 – 4화. 답장을 기다리며
정숙을 만나고 돌아온 이후, 나는 며칠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더미는 그대로였고, 시곗바늘 소리만 귀에 박혔다.
내가 다니는 구청 건물은 벽이 얇아 겨울이면 손끝이 시릴 정도였다.
사무실 구석에서 타는 연탄난로의 연기가 가끔 눈을 맵게 했지만, 그보다 더 진한 것은 정숙에 대한 생각이었다.
처음엔 예의로 만난 인연이라 생각했다.
아버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걸음, 인사치레라 여겼다.
하지만 정숙을 본 뒤로는 다른 여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이 적고, 눈길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속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오래 마음에 남는 사람. 말이 없는데 자꾸 생각나는 사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집안 어른들 눈치를 보며 철들어야 했던 내게
그 조용한 아가씨는 색시감이라는 말보다 더 큰 의미였다.
그저 '좋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이 떠오르고, 이름을 속으로 부르게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결국, 마음을 눌러 담은 편지를 썼다.
밤늦도록 전등 아래에서 종이를 몇 번이고 갈아가며 정숙에게 썼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날 당신을 보았는지,
당신과 마을을 걸으며 얼마나 편안했는지.
그리고 그 이후로 마음이 얼마나 잦아들지 않았는지를.
편지를 부치고 며칠을 기다렸다.
우체부 아저씨가 담장 너머로 봉투를 툭 떨어뜨릴 때마다 심장이 먼저 뛰었다.
하지만 정숙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전화도, 전보도, 마음을 전할 방법이 많지 않았던 시절.
한 통의 편지가 닿고, 다시 한 통이 돌아오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마저도 돈이었고, 마음도 담보여야 했다.
그 시절엔 꼭 가야 할 곳에만 기차를 탔다.
가보고 싶다고 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며칠은 정숙 생각을 잊고 지내려 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종이 서류를 정리하고, 밤엔 이불속에 파묻혀 잠을 청했다.
그런데 왜, 자꾸 정숙이 떠오를까.
왜 대답한 줄 없는 그 아가씨 얼굴이,
이렇게 오래 내 마음을 눌러앉는 걸까.
혹시, 내 마음이 너무 앞섰던 걸까.
그녀는 나를 그저 '약속의 사람'쯤으로 받아들였던 건 아닐까.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나는 그저 담배 한 개비 없이 마당을 서성였다.
지금 다시 편지를 써도 괜찮을까.
아니, 한 번쯤 더 보고 싶다고
기차를 타고 다시 그 마을로 가도 되는 걸까.
누가 허락해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막는 것도 아니지만
이 시절의 사랑은, 참으로 고요하고 간절하다.
나는 그 고요한 간절함 속에서
정숙의 얼굴을, 그날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