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의 시점
제9화. 답장 그리고 마음을 담은 편지
편지를 보낸 지 열흘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시절이 다 그랬다.
사람이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없던 시절.
전화 한 통도, 전보한 줄도 사치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더 분주했다.
정숙 아가씨의 얼굴이 매일처럼 떠올랐다.
말없이 웃는 눈매, 개울가에 멈추어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던 모습.
사진보다, 기억이 더 선명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밤이 늦도록 불을 켜놓고 두 번째 편지를 썼다.
첫 편지보다는 조금 더 마음을 실어.
조금 더 진심을 들여다보이게.
조금 더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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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의 두 번째 편지 일부]
> 정숙 아가씨께
첫 편지를 드리고 한참이 지났습니다.
무소식도 소식이라 하지만, 제 마음엔 날마다 그 마을의 개울과
아가씨의 정숙한 얼굴이 떠올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괜한 기대였나 싶다가도, 아니겠지 하고 마음을 고쳐 잡곤 합니다.
서울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그날 마을을 함께 걸었던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피었다 지기를 반복합니다.
혹여 이 글이 부담되시거든, 그저 안부만이라도 주시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기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부디 강녕하시기를 빕니다.
서울 장충동에서, 윤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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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부치고도 사흘은 더 마음을 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집 마당으로 우체부 아저씨가 종이봉투 하나를 툭 떨어뜨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봉투를 주워 들었다.
‘정숙’이라는 두 글자가, 낯익은 필체로 쓰여 있었다.
묘하게 울렁이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봉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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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의 첫 답장 중에서]
> 윤호 씨께
편지, 잘 받았습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답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집안일이 바쁘기도 했고, 제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며칠을 망설였습니다.
서울은 요즘 어떤지요.
고단한 일상에 무리하진 않으시는지요.
전해주신 가족들 안부, 고맙게 들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마을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꾸 윤호 씨를 묻습니다.
지난번 함께 걸었던 그 개울가를, 혼자 다시 다녀왔습니다.
그때 보였던 연둣빛이 이제는 초록으로 짙어졌습니다.
저도… 다시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정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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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답장을 읽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조심스러운 말투, 짧은 문장들 사이로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
이제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나는 그날 밤, 세 번째 편지를 썼다.
처음보다 길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더 단단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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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의 세 번째 편지 일부]
> 정숙 아가씨께
당신의 글을 받고 마음이 놓였습니다.
망설이셨다 하셨지만, 그 한 줄 한 줄이 저에겐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개울가를 혼자 걸으셨다니,
저 또한 그 장면을 상상하며 잠들었습니다.
사실 제 마음은, 처음 그 마을에서 아가씨를 뵌 날부터
당신을 향해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감히 여쭙습니다.
혹시, 다시 그 개울을 저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다음엔, 제 손을 살짝 내밀어도 괜찮겠습니까.
급한 것도, 다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마음을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봄이 끝나기 전까지,
그리운 마음으로.
윤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