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품은 집》

6

《산이 품은 집》

6화. 사과밭에 핀 사랑, 그리고 마을의 봄

사랑은 아주 평범하게 시작됐다.
여동생의 친구였다.
옆동네에서 넘어온, 웃음이 예쁘고 말이 또렷한 아이.
처음엔 몰랐다.
그 아이가 내 인생의 전부가 될 줄은.

처음 마음을 알아챈 건,
마을 잔칫날이었다.
나는 술 심부름을 하고 있었고,
그 아이는 부침개를 굽고 있었다.
가마솥 앞에서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고,
그걸 손등으로 훔쳐내는 모습이
왜 그리 눈에 밟혔는지 모르겠다.
그날 이후 나는 술심부름이든 뭐든 자청해 잔칫집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고,
그 애는 웃었다.
내가 좋아하던 여동생의 웃음과는 또 다른,
더 깊고 단단한 웃음이었다.
마치 내 마음을 먼저 알아버린 사람처럼.

우린 많은 걸 말하지 않아도 통했다.
나는 산과 들을 이야기했고,
그녀는 책과 사람을 이야기했다.
나는 몸으로 살던 사람이었고,
그녀는 말과 눈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던 세계였다.

결혼은 조용히 치러졌다.
마을 사람들 모두 축복해 주었다.
아버지는 고개만 끄덕이셨고,
어머니는 장독대 앞에서 눈시울을 훔치셨다.
그날 이후 우리 집 마당은,
더욱 분주해졌다.

**

결혼하고 나니,
아내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손끝은 야무졌고, 눈빛은 깊었다.
나는 점점 ‘이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마을에 서당이 생겼다.
읍내에서 오신 훈장이
늦깎이 농사꾼들에게 ‘글’을 가르쳐 준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누나들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사람은 배워야 산다.”
그 말이 지금은 와닿았다.
그래서 아내의 등을 떠밀듯, 나는 나를 서당으로 밀어 넣었다.

낮에는 밭일, 밤에는 책.
어렵긴 했지만, 나는 점점 세상이 넓어진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배움이 내 삶을 바꾸었다.

**

사과를 처음 본 건,
마을 회관에 걸린 농업 책자에서였다.
“우리 동네에서도 이게 될까?”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무모하다는 말도 들었다.
산속이 사과엔 춥지 않냐는 걱정도 있었고,
밭을 다 없애고 사과나무를 심는 걸
‘도박’이라 말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조용히 말했다.
“밭을 파는 손이 든든하니까, 사과가 열릴 거야.”

그 말 하나에 버텼다.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
사과는 꽃을 피웠고,
그 꽃이 열매를 맺었고,
우리 마을은 드디어 ‘특산물’이 생겼다.

나라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지원이 들어오고,
마을 청년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버려졌던 밭에 다시 사람이 들어섰고,
우리 집엔 어르신들이 차를 마시러 오기 시작했다.

나는 젊음을 그 사과밭에 태웠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항상 아내가 있었다.
낫을 들고, 손수건을 두르고,
혹은 조용히 나의 계획서를 대신 써주는 밤에도.

그 사람 없었으면,
나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

지금도 나는 새벽에 밭에 나간다.
사과꽃은 여전히 해마다 핀다.
그 옆에, 내가 심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내가 놓고 간 작은 의자 하나가 있다.

지혜로웠던 그녀.
배움의 문을 열어준 그녀.
마을을 함께 바꾼 내 사람.

나는 사과밭 사이를 걷는다.
그 길 끝에는 늘 그녀가 있다.
어느 계절에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산이 품은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