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품은 집》

10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산이 품은 집》

10화. 사과나무와 산길 사이에서

사과 과수원은
계절을 타지 않는다.
겨울에도 쉴 틈이 없다.
눈 내리기 전엔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눈 녹자마자 전정 작업,
그 뒤엔 수정, 솎기, 병충해 방제, 수확, 선별…
사계절 내내 손이 간다.

농사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로는 모자란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도
매일 마음을 주고 또 줘야 한다.
단단하고 곱게 열매 맺도록
사람의 손이 끝없이 닿아야 하니까.

내가 키우는 건
그저 과일이 아니다.
아이들 밥상이 되고,
부모님 손에 들리는 간식이 되고,
누군가의 명절 선물이 되는 그 사과다.
그러니 정성 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

하지만
그렇게 바쁜 사계절 속에서도
나는 틈이 나면 산에 오른다.
그건 아무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내 시간이다.

**

해가 뜨기 전,
아직 새소리가 들리기 전
나는 장화를 신고 산으로 향한다.
사람도, 말도 없는 산속을 걷다 보면
내 안에 웅크려 있던 생각들이
하나둘 제 자리를 찾아간다.

**

산은 나에게
처음 ‘재미’라는 걸 알려준 곳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 따라 산에 가서
버섯을 땄다.
입에 풀칠하려던 일이었지만
나에겐 놀이였고, 배움이었다.

아버지는
풀잎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이건 삿갓나물이다.”
“이건 구절초. 이건 싸리.”
그 옆에서 나는
자연이 곧 교과서란 걸 알았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내 몸에 산이 배인 건.

**

지금도 버섯 철이 되면
이른 새벽 어깨에 배낭을 메고 나선다.
능이버섯, 송이, 싸리…
산이 주는 귀한 것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그 자리에서 숨을 깊이 들이쉰다.

약초도 그렇다.
더덕, 천궁, 쇠무릎…
채취하려고 간 게 아니라
찾는 그 시간이 좋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가벼워지는 일이다.

**

내가 사과밭에서
공동체와 미래를 위해 일한다면,
산에선
그저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아도 좋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걷고, 냄새 맡고, 듣고, 쉬면 된다.

**

언젠가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사과나무 손질이 버거워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은 끝까지 다니고 싶다.
혼자일지라도,
숨이 차도,
산길을 걸으며
내 삶의 처음을,
그리고 나중을
고요히 정리하고 싶다.

**

그렇다고
사과 과수원이 내게 덜 소중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사과나무와 산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람을 위한 농사와,
나를 위한 산길.
그 둘이 있어
나는 오늘도 아침을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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