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귀가 얇은 어느 여름날

마루끝일기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마루끝일기 20화 - 귀가 얇은 어느 여름날

2025년 8월 6일. 비가 왔다.
늦여름의 빗소리는 참 묘하다.
여름을 채 다 보내지 않은 허전함도,
어쩐지 조금은 선선해진 바람에 가을이 엿보이기도 하고.

오늘은 유난히 헬스장에 가고 싶은 날이었다.
늘 그렇듯 마음만 앞섰다. 운동화 끈을 묶고, 에코백에 물병이랑 수건을 넣으며
스스로를 부지런한 사람처럼 착각한 것도 잠시.
현관문을 열기 직전, 전화벨이 울렸다. 낯익은 번호였다.
몇 년째 우리 가족 휴대폰을 맡아서 관리해 주는, 단골 통신사 직원이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아마도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통신사를 바꾸지도 않고,
그 직원이 추천해 주는 대로 기기변경을 하며 살아왔다.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신뢰가 쌓여버렸다. 그도 나도,
무덤덤하게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이 어쩌면 영업 이상의 관계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기종이 나왔어요. 할인도 많이 들어가고, 가족 요금제 묶어서 조정도 가능해요.”
며칠 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사실 지금 쓰는 폰도 아무 문제없다. 카메라도 좋고, 속도도 빠르다.
하지만 그 순간, 괜히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 아니면 손해 보는 걸까?’
이유 없는 불안감이 나를 다시 통신사 매장으로 향하게 했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매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서류에 사인을 하고, 설정을 맞추고, 데이터 이전을 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매번 익숙할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낯설고, 귀찮고, 지쳤다.
처음 보는 기종의 무게감도 어색했고,
변한 요금제의 복잡한 구조도 이해가 안 됐다.
직원은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머리에 남는 건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가 설명해 주니 왠지 괜찮은 거래처럼 느껴졌다.

하루가 다 저물 무렵,
정신없이 매장을 나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럴 때면 꼭 이상한 버스를 탄다.
오늘도 역시, 잘못된 노선을 탔다.
두 정거장 지나서야 눈치를 채고 허겁지겁 내렸다.
비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들러붙었다.
에코백 안의 수건은 운동용이 아니라, 나를 닦아주게 되었다.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니,
어디선가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흐릿한 가로등 아래 물웅덩이가 번들거렸다.
문득 생각났다.
오늘 운동 가려고 했었지.
그 결심은 또 그렇게 미루어졌다.

헬스장 대신 통신사를 다녀온 하루.
건강 대신 기기변경을 선택한 하루.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 속에서,
나는 또다시 귀가 얇았고, 조금은 지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날들이 나중엔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러니까, 오늘도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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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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