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끝일기 22화

기계는 참, 잘도 기억한다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마루끝일기 22화

2025년 8월 7일. 기계는 참, 잘도 기억한다

어제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놨더니,
오늘 아침 남편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단다.
“에어컨 하루 종일 틀지 말아 달래.”

순간, 무슨 소린가 싶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제는 비가 와서 딱히 덥지도 않았고,
기분 탓인지 습한 느낌에
에어컨을 잠깐 켜둔다는 게
외출하면서도 안 끄고 나가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틀어져 있었으니…
남편 핸드폰에 깔린 ‘원격 제어 앱’이 경고를 띄운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에어컨이 1등급 전기제품이니 괜찮겠지 싶어
그냥 틀어놨었다.
하지만 전기요금은 기술의 등급이 아닌
‘시간’에 따라 올라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오늘 아침, 남편은 출근하며
에어컨을 아예 꺼놓고 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조용한 경고 하나 받은 기분.

하지만, 뭐랄까.
원래 나는 낮에 잘 틀지도 않는데,
괜히 ‘기계에게 감시당했다’는 느낌에
내가 조금 작아진다.

그 와중에, 어제 개통한 핸드폰 개통 매장에서
전화가 왔다.
“시계 나왔어요.”

그러자마자 또 매장으로 들렀다.
워치란다.
새 폰을 개통하면 같이 따라오는,
그 유명한 스마트워치.

직원은 반짝이는 눈으로 건넸고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이거, 팔아주세요.”

저번 워치도 일주일을 채 쓰지 않았다.
충전도 귀찮고, 손목도 답답하고,
시계가 울리면 괜히 더 긴장되고.
그래서 어딘가에 따로 치워뒀던 걸
이번엔 직원이 “가져오면 팔아드릴게요” 했다.

나에게 워치는
필수품이 아니라,
귀찮은 존재라는 게 분명하다.

사실,
핸드폰 하나만 있어도
이 세상 모든 것이 손안에 있다.
계산도 되고, 사진도 찍고,
뉴스도 보고, 건강도 측정하고.

하지만 그 모든 걸 손에 쥐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점점
기계에 더 붙잡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에어컨도,
핸드폰도,
워치도.

언젠가부터 기계는
내가 깜빡한 것까지 기억하고,
내가 하지 않은 선택까지
‘권장’하고, ‘알림’하고, ‘제어’한다.

그 속도를 다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늘 한 발 늦게
“이건 또 뭐지?” 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래도,
그게 나니까.
기계를 원망하기보다는,
조금씩 적응하며 사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헬스장에 도착해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예전 같으면 그냥 걸었을 거리인데
이젠 꼭 걸음 수를 체크해야만
운동을 ‘제대로 한 기분’이 드는 것도
좀 웃긴 일이다.

편리함 속에 불편함을,
기능 속에 나태함을
숨기고 사는 하루하루.

오늘은,
그 기계들의 사이에서
내 존재를 지키는 연습을
또 한 번 해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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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하나 틀었을 뿐인데, 남편에게 경고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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