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의 복수
마루끝일기 28화 – 토마토의 복수
아침 공기가 생각보다 선선했다.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바람이 어쩐지 가을을 데리고 온 듯했다. 부엌 창을 열자 창틀 너머로 햇살이 길게 들어왔다. 그 빛 속에, 싱크대 한쪽에 쌓인 토마토들이 빨갛게 반짝거렸다.
“이 녀석들, 오늘은 네 차례구나.”
그동안 냉장고에 ‘귀빈 모시듯’ 보관해 둔 토마토들과, 그저께 농장에서 막 따온 토마토를 모조리 꺼냈다. 모양은 울퉁불퉁하고 크기도 제멋대로지만, 그 속은 설탕보다 달았다.
커다란 냄비를 꺼내 토마토를 가득 담았다. 마늘도 한 움큼, 껍질을 벗겨 던져 넣었다. 도깨비방망이를 들고 ‘으득으득’ 갈기 시작했다. 손목에 힘이 들어갈수록 토마토 향이 부엌에 퍼졌다. 소금과 올리브유, 그리고 설탕을 한 숟갈 넣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한테 살짝 양념을 해주는 기분이었다.
불을 올리고 나니 토마토들이 서서히 숨을 죽였다. 거품이 올라오고, 색이 점점 진해졌다. 한참을 조리다 보니 수분이 날아가고 걸쭉함이 얼굴을 내밀었다.
“됐다, 이 정도면.”
스테인리스 용기에 절반쯤 덜어내고, 나머지 절반에는 오늘의 ‘특별 게스트’를 초대했다. 원래는 소고기를 넣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스팸을 더 좋아하니 어쩔 수 없었다. 스팸을 채 썰고, 양파를 얇게 썰어 달궈진 팬에 넣었다. 지글지글 소리가 ‘좋아, 바로 이거야’ 하고 말하는 듯했다.
양파가 투명해질 즈음, 토마토소스를 붓고, 케첩과 치즈를 몇 조각 넣었다. 치즈가 녹으면서 소스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니, 마치 겨울날 담요 속으로 파고드는 아이 같다. 스파게티 면을 삶아 물기를 털고, 소스와 버무렸다. 향만으로도 남편이 부엌으로 달려올 것 같았다.
남편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식탁에 앉았다. 스파게티와 어제 해둔 호박죽을 함께 올리자, 남편의 표정이 환해졌다.
“오, 오늘은 양식이랑 한식이 같이 나오네? 이게 바로 퓨전인가?”
“그렇지, 호박 스파게티…는 아니고 그냥 같이 먹는 거야.”
남편은 포크를 돌려 면을 한 입 크게 먹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토마토가 나한테 복수하는 맛인데?”
“뭐가 복수야?”
“내가 어릴 때 토마토 안 먹고 도망 다닌 거, 이걸로 갚는 거지.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네.”
그 말에 나도 웃음이 터졌다.
남편은 한 숟가락씩 호박죽을 곁들여 먹으며, 마치 세계 어디에도 없는 ‘토마토-호박 코스요리’를 즐겼다.
“이 조합, 유럽에서도 못 먹어봤을걸?”
“당연하지, 유럽 사람은 호박죽이 뭔지도 모를걸.”
그렇게 아침 식탁은 토마토와 호박, 그리고 남편의 농담으로 활기가 돌았다.
식탁 옆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밖에서는 참새들이 지저귀고, 마당 고양이가 여유롭게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부엌 한편에 여전히 남아 있는 토마토들을 바라봤다. 오늘로 다 못 해치울 테니, 내일은 토마토 잼이라도 만들어야겠다.
남편이 문을 나서며 한마디 더 던졌다.
“오늘 점심에 회사에서 토마토 나오면, 난 그거 먹고 울 수도 있어.”
“왜?”
“아침에 너한테 복수당했는데, 점심에도 당하면 그건 진짜 몰살이잖아.”
그 농담에 나도 한 번 더 웃고, 남편을 배웅했다.
오늘은 부엌과 식탁, 그리고 토마토가 하루를 채운 날이었다. 그 복수(?)의 맛은, 아마 내일 아침까지도 남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