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맛

고인돌 위의 포도맛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1. 하늘색 교복과 포도 향기


전남 고흥 과역면. 바닷바람이 조금은 거칠지만, 여름 끝자락이 되면 바람 속에 포도 향이 섞여 들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하늘빛이 은근하게 스민 교복 상의와 진남색 바지, 그리고 머리에 꼭 맞게 눌러쓴 교모를 쓰고 다녔다.


솔직히 그 교모는 여름엔 덥고 겨울엔 차가웠다. 모자 안쪽 땀자국이 마치 나만의 문장처럼 자리 잡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 쓰고 다니면 ‘나도 이제 어엿한 중학생’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다. 마을 어른들도 “오, 이제 중학생 다 됐네” 하고 인사해 주시니, 모자가 조금은 불편해도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그 시절 포도가 익는 계절은, 우리에게 단순한 가을이 아니라 달콤한 축제였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엔 넓디넓은 포도 과수원이 있었고, 집 뒤에도 작은 포도나무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집 포도는 과수원 포도 맛을 절대 따라가지 못했다. 집 포도는 익숙하고 평범했지만, 과수원 포도는 마치 비밀스러운 보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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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전거 대신 걸어간 이유


학교에서 집까지는 자전거로 15분 남짓이면 도착했다. 하지만 포도철만 되면, 자전거는 교실 한쪽에 세워 두고 걸어갔다. 걸어가면 시간이 두 배로 걸렸지만, 그 길은 친구들과의 수다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야, 오늘은 포도 사 먹고 가자.”

“그래, 어제 먹은 거보다 더 달아졌대.”


그 한마디면 발걸음은 자동으로 과수원 쪽으로 향했다. 바람이 치마 자락을 스치고, 가로수 사이로 햇살이 드문드문 떨어졌다. 먼 길 옆 논에서는 벼가 고개를 숙이며 바람에 출렁였고, 참새들이 바쁘게 날아다녔다. 흙냄새와 풀냄새 사이로 스며드는 달큼한 포도 향이 우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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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모에 담긴 보랏빛 보물


과수원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들리는 건 뻐꾸기 소리와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였다. 커다란 원두막 그늘 아래,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봉투 줄까?”

과수원 아저씨가 물으면,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모자에 주세요!”


교모 안에 포도송이를 가득 담으면, 그 무게에 모자가 살짝 휘어졌다. 포도알이 모자 속에서 굴러다니며 ‘톡톡’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친구 얼굴을 보면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서로 쳐다보다가 또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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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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