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같은 방향을 보는 시간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26화 — 같은 방향을 보는 시간

청주 현장으로 출발하는 아침,
차 안은 유난히 고요했다.

이른 시간의 도로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그 틈을 비집고
미화와 그는
나란히 현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엔
서로를 재촉하지 않았다.


---

사무실과 도청, 시청을 오가며
몇 시간 동안
그와 미화는
일에 대해,
지금의 현실에 대해,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까지
천천히 꺼내 놓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미화에게 처음처럼 설명했다.

성공보다
실패를 먼저 말했고,
자랑보다
부끄러웠던 순간들을 꺼냈다.

미화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사람처럼 느껴졌다.

대단한 인맥도,
이름 앞에 붙은 직함도 아닌—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그대로 안고 있는
한 사람으로.


---

관공서를 오가는 사이,
서로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문을 열어주고,
서류를 챙기고,
짧은 눈짓으로
다음 동선을 확인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순간들이
점점 늘어났다.

미화는
그 순간들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사랑의 긴장도,
불안한 설렘도 아닌—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안정감.


---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다시 차에 올랐을 때
미화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간이
계속될 수 있다면—

의심도,
결혼이라는 말도,
받지 않는 전화도 없이
그저
현실을 함께 살아가는
이 느낌만 남는다면.


---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

“이렇게 일하면서
같이 움직이는 게
난 제일 편해.”

그 말에는
어떤 계산도
다짐도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었다.

미화는
그 말에
괜히 마음이 놓였다.


---

청주의 오후는
생각보다 길었고,
해가 기울 때까지
둘은 같은 공간을
오래 공유했다.

그 시간 동안
미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

그날,
미화는 오랜만에
이 관계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으로 느꼈다.

안정감,
편안함,
그리고
조용한 신뢰.

그 모든 것이
한데 섞인
소중한 시간이었다.

미화는
그 시간이
오래 남기를 바랐다.

아직은—
아직만큼은.

그 안정감이
언젠가 다시
의심에 잠식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미화는
그날의 청주를
마음 깊숙이
간직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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