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5일 캐나다 입성 딱 1년 되는 날, 아이가 다니던 대학 여름캠프에서 오픈하우스가 있었다. 말은 거창하지만 1주일짜리 캠프 마지막 날 학부모들 앞에서 그동안 한 것을 보여주는 발표회 같은 거였다.
밴쿠버 일대에서 꽤 유명 대학인 SFU(Simon Fraser University)가 우리집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서 온 6학년 조카를 그 대학 캠프에 등록해 보내고 있었다. 라이드를 해주느라 늘 셋이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딸아이가 오빠가 SFU 캠프 다니는 걸 부러워하길래 일주일이라도 한번 해보라고 등록해주었다. Science Alive이라고 하는 과학 캠프를 보냈는데, 울 만수는 왜 여길 안 다니고 학교랑 동네 커뮤니티 센터 캠프를 다녔을까.. 이유는 딱 한 가지.. SFU 캠프는 엄청 비싸다는 거..
오픈하우스 행사를 한 곳은 대학교의 극장식(강단을 내려다보는) 강당이었다. 우선 학년별로 구성된 반끼리 앞에 나와서 며칠동안 각자 만든 과학 작품들에 대해 한 명 한 명 얘기해보는 순서가 있었다. 맨 처음이 울 만수네.. 2, 3학년으로 구성된 Quark Camp. Science Alive에서 가장 어린 반이다.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쪼르르 자기 작품들을 하나씩 안고 나와서 리더들의 질문에 한 명씩 대답하면서 설명해주는 거다.
SFU 여름 캠프 오픈 하우스 참관
정말 뼈저리게 느낀 점.. 거기 아이들은 어쩜 그렇게 말들을 잘 하는지.. 어른이고 아이고 간에 사람들 앞에서 뭔가 말하는 거에 대한 두려움이나 쑥스러움이 전혀 없다(적어도 없어 보인다). 그냥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우리 나라는 어떤가.. 어른이 되서도 앞에서 뭔가 말하라고 하면 쑥스럽고 피하고 싶고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몸을 배배 꼬면서 모기 같은 목소리로 말이 기어들어가고 그러지 않나 말이다. 혹시 지금은 다른가.. 적어도 10년 전엔 그랬던 것 같다.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도 항상 받았던 프레젠테이션 스트레스가 생각나면서, 나도 캐나다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런 스트레스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암튼.. 드디어 울 만수의 순서.. 은근 내가 긴장이 되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에 대고 영어로 말을 해야 되는 건데.. 어찌나 몸을 배배 꼬던지.. 한국 애답다.. ㅋㅋ 리더가 울 만수가 만든 것이 어떻게 작동하냐고 묻는 거 같았다. 만든 게 뭔지는 모르지만, 울 김만수 과학 용어를 마구마구 구사하며 (‘회로’라는 뜻의 circuit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면서) 한국식 억양이 아니라, 정말 영어하는 아이의 억양으로 그럴싸하게 얘기한다. ㅎㅎ
얼마나 장족의 발전인가.. 정말 용 됐다. 불과 11개월 전 스카우트 처음 갔던 날이 생각나던 순간이었다. 스카우트 리더가 몇 살이냐고 묻는데 영어를 하나도 몰라 못 알아듣고 쩔쩔 매던 아이가 떠올랐다.
친정 엄마가 오셨을 때 학교에 따라가서, 교실 밖에서 아이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걸 듣다가 가슴이 찡하셨단다. 저 어린 게 처음 왔을 때 저런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고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워 눈물이 나더라고.. 하지만 기특하게도 울 만수는 말 못 알아듣는 스트레스를 별로 보이질 않았다. 말이 안 통해도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그리고 눈치가 좀 빠른 덕분에 잘 헤쳐 나간 것 같다. 참 감사하는 부분이다.
1년쯤 되니, 이젠 잠꼬대도 영어로 하고, 집에서도 영어를 많이 쓰는데, 꽤 정확하고 유창한 수준이 되었다. 아이가 영어가 되니, 시켜 먹을 수 있어서 난 편해진 점이 있었다. 전에는 맥도날드를 가도 꼭 내가 주문해야 하고, 케찹을 더 달라는 말도 꼭 내가 가서 해야 해서 좀 귀찮았는데, 아이를 대신 시킬 수 있게 된 거다. ㅋㅋ
물론 한국어 구사력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두리번 두리번 본다는 말을 ‘둥글게 둥글게 본다’고 하질 않나.. ㅎㅎ 그래도 한국에 돌아가면 금방 적응할 거라고 믿었기에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